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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 새정치민주연합 파주을지역위원장 |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협력 당사자인 북한은 3년째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일각에선 해외에서 사업 추진 의사를 던지고 북한은 가부간에 결단을 내리라고 다그치는 방식에서, 북한의 반대는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도 나온다.
세계평화공원 구상의 진정성도 의심받고 있다. 애시 당초 추진 의도가 맑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사업은 북이 강하게 반대하면 할수록 평화주의에 호응하지 않는 악한 세력으로 몰며 현 정부에 우호적인 여론을 이끌어낼 수 있고, 북의 무력행동을 유인(?)할 수도 있으며, 만에 하나 북이 호의적으로 나오면 남북분단사 이래 가장 큰 업적으로 삼을 수도 있는, 밑질 것 없는 잘 계산된 ‘한 수’라는 것이다.
또 한편에선 세계평화공원 사업이 특정건설세력의 이권이나 특정업체의 반사이익(수혜주)과 결부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있다. 특히 대선 당시 파주연천을 염두에 둔 경기 북부권공약(DMZ한반도생태평화벨트 조성)으로 간접 시사된 사안인데도 강원도 지역과 불필요한 공원 유치 경쟁을 조장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만일 세계평화공원이 다목적 포석용에 불과하다면 유치되기를 희망했던 파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 주민들은 사정도 모르고 들러리가 된 샘이다.
분단 상황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나 통일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강구되고 강온전략이 구사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공원 사업 구상도 그런 맥락에선 나름 유의미한 시도라고 평가해주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비무장지대를 무대로 한 남북협력사업 모델이 그저 ‘공원짓기’ 하나뿐 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비무장지대에 대해 세계평화공원 외에 어떠한 계획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비협조만을 탓하면서 말이다.
국제사회 유일의 분단대치 지역이고 세계적 군사화약고인 이곳에 랜드마크(Landmark)를 세워 ‘평화’의 가치를 기려보자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공원 형태로 구현되어야 하느냐 에는 수긍할 수 없다. 비무장지대는 전 구간에 걸친 조망과 접근이라는 ‘광역적 관점’, 자연생태 보존이라는 ‘환경적 관점’,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는 ‘효용성의 우선순위’와 ‘중장기적 계획’등 중층적인 원칙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이 ‘비극의 땅’이 다시 남북통일 시대의 ‘희망의 땅’으로 반전될 수 있다.
그러려면 자연환경을 보존하면서도 필요적절한 선에서 남과 북이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사업 모델들이 좀 더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돼야 한다. 공원 사업과 같은 점(點) 중심의 보여주기식 사업, 토건주의적 사업으로만 고착하면, 남북관계 악화 변수에 따라 개성공단이나 금강산관광사업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폐쇄되는 유령지가 될 수 있다. 엄동설한 싸늘한 방에 촛불 하나를 켜 두기보다는 방 전체에 군불을 떼야 비로소 ‘냉기’가 가시는 이치와 같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분단의 비극과 평화에 대한 가치를 체감할 수 있는 유사시설로는 임진각공원, 통일전망대 등 이미 충분하다. 관광에 주안점을 두더라도 잠시 둘러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들어 평화의 본령을 체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쉽게 범할 수 없는 평화성역적 효과를 담보하기 위해서 국제회의·국제기구·NGO·학술연구단체 등을 적극 유치해 적절한 위치에 정주시키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일로 가장 무난한 것은 문화재 공동조사발굴 사업이라고 본다. 선사시대부터 한국전쟁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역사적 흔적들과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를 남북이 함께 발굴·보존·복원하고 연구·기록하는 과정을 통해서 잃어버린 민족적 동질성과 역사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동물·식물·식생·지형·자연경관 등에 대한 종합적인 생태환경자원 조사도 필요하다. 경제성 높은 광물자원이 대량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는 연구도 있는 만큼, 환경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지하자원 부존여부를 남과 북이 함께 탐사하는 작업도 좋겠다.
더 나아가, 비무장지대를 지리지형 특성과 환경가치 우열에 따라 핵심보존지와 이를 감싸주는 완충지 그리고 일반보존지로 세분화해 본다면, 일반보존지에서는 고소득 작물 중심의 합작영농을 하는 방안도 강구해 볼 수 있겠다. 비무장지대산(made from KOREA DMZ)으로 브랜드화한다면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먹는 샘물 분야는 음료업계 최고의 호황 상품이다. 환경과 안전을 중시하는 소비성향은 꾸준할 것이다. 비무장지대 지하의 우수한 수질과 풍부한 매장량을 바탕으로 이를 평화청정수로 상품화한다면 충분한 국제경쟁력을 기대할 수 있다. 사업투자비도 적고 설비도 간단해서 단기에 수익창출이 가능하므로 여러모로 최적의 협력사업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다.
스페인 산티아고 길은 자연과 주변 인문자산을 상업성을 드러내지 않고 상품화한 성공적 사례다. 연 관광객이 600만 명을 넘고 1조원대의 경제이익을 주고 있다. 비무장지대가 갖는 자연경관, 생태자원, 식생변화, 변화무쌍한 지형지물, 분단사 스토리, 인접지 특화마을 등을 잘 조합한다면 동서를 잇는 명품 생태평화순례길이 될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이 이곳을 걸으면서 남한의 기술력과 연출력, 북한의 기예단이 함께 만들어낸 최고의 서커스 공연도 보고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와 같은 세계평화대축제를 감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선결되어야할 것은 안전의 문제다. 60여년간 남과 북이 막구가내로 매설해 온 수많은 지뢰밭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이 비인간적이고 비참한 살상용 무기들을 과감하게 소거하는 작업이 남북 합작으로 진행돼야 한다.
비무장지대 사업은 통일을 점진적으로 촉진하는 민족사적 대형 프로젝트다. 따라서 투명한 정책결정과 사업진행이 중시돼야 하고, 관료나 개발주의자들의 이익, 부동산 투기, 이면거래 등 사회적 공분을 사는 일이 개입돼서는 아니 된다.
남북간의 입장차를 좁히기 위해선 장기적인 비전과 구체적인 계획 그리고 양측에 현실적 도움이 되는 명확한 ‘안’을 가지고 북과 진솔하게 논의하고 설득을 이어가야 한다. 임기 내에 무언가를 근사하게 지어보이겠다는 시현 내지 성과주의 강박이 아니라, 2-3-2 또는 3-4-3 등 단계적이고 연차적으로 긴 호흡을 갖고 ‘비무장지대 재생·보존·활용 종합계획’을 집행해 가야 한다. 여러 국가가 주체로 혹은 옵저버로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이곳을 세계 구성원 모두의 공공재 개념으로 승화하여 ‘중립지대화’ 하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새로운 협정과 조약이 검토돼야 하고, 60년간 행사되지 못한 민간 소유권의 국유화 내지 보상도 정비가 필요할 것이며, ‘비무장지대보존과 활용에 관한특별법’ 제정 등 입법적 토대도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남북 모두에게 지속가능한 이익이 되고, 통일과 세계평화의 구심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비무장지대의 마스터플랜을 시작할 마음만 있다면 모든 것이 수년 내지 십년 안에 현실이 될 수 있다. 비무장지대는 남북분단의 비극적 결과이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대안도 없는 현실이 더 비극이다. 올바른 상상력은 능히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