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문중을 찾아서
권효숙
연재를 시작하며.....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삼고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문치(文治)의 꽃을 피워낸 나라였다. 주자학의 이론과 가치를 국가 경영에 적용하고 주입시켰고 이런 가치는 양반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양반은 국가 경영의 주체였고, 주자학 이념의 수호자였으며 문치를 앞장 서 이끄는 관료이자 학자였고 격조 높은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문화예술인이었다.
이러한 양반들은 학문적, 정치적 권력과 또 다른 가계의 계승을 통해 ‘가문권력’의 형성을 이루게 되는데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가문의 존재가 부각되고 그 영향력이 강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를 기점으로 혼인과 상속 등의 제도가 완전히 변화하고 예학과 주자학적 실천 윤리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즉, 예학의 시대, 부계친 중심의 ‘남자의 시대’ ‘가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17세기 이후의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문을 알아야 하며 가문을 안다는 것은 그들의 혈연권력이 어떠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그 사회의 정치.사회.문화적 삶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분석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향촌사회에서 지배세력의 대부분은 문중 조직을 형성하게 되는데 어떠한 인물이 이 지역에 입향해 왔는가 즉, 입향조(入鄕祖)로부터 시작이 된다.
파주는 고려시대 도읍지 개성과 가까운 근기(近畿)였기에 관직을 통해 이 지역에 입향하여 뿌리를 내린 인물이 많았다. 오랜 옛날부터 ‘서교(西郊)’라고 불려지면서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터를 잡은 토착세력들이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고 주요 사림들을 배출하거나 왕실과의 혼맥을 통하여 정치적인 주도권을 이어나갔다. 특히 이 지역은 ‘문향파주’라는 이름에 걸맞게 걸출한 성리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파주는 도성과의 접근성이 용이해 사족들이 벼슬생활을 할 때는 경저(京邸)를 두고 서울에서 생활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는 향저(鄕邸)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고, 사후에는 이곳에 묘역과 위토를 마련하여 후손들이 정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문중 조직의 구심점은 5대 이상의 선조에 대한 불천지위(4대봉사 이후 시제로 넘기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제사를 지내주는 신위. 공신이나 왕자. 부원군 등 국가에서 지정해주거나 문중에서 자체 지정하기도 한다.)의 기제사 또는 입향조와 선조들의 묘제사(시제)이다. 문중 종인들의 결합되는 범위는 동고조팔촌(同高祖八寸)을 넘어서 형성되며, 지속적이고 반영구적인 조직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중 조직의 형성은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필히 문중계(門中契)와 종중규약을 탄생시킨다. 문중에 따라서 사패지로 받은 종토가 많은 경우도 있고, 위토와 종중재산이 많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서 문중은 각 가문의 형세와 상황에 따른 다양한 조직 경영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파주지역의 다양한 문중 경영을 알아보기로 하며, 문중을 이루게 한 입향조, 또는 파시조에 대한 내력, 시제사, 문중의 인물들, 문중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유적, 문중 종인들의 이거(移居)와 세거형태 등에 대해 연재를 시작해보기로 한다.
①장수 황씨 방촌 황희 문중
조선의 명재상 장수황씨 방촌 황희 문중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 황경(黃瓊)은 통일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시중을 지냈다. 그 후 세(世)를 이어오던 계보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증참의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여 대(代)를 이어오고 있다.
『여지승람』전라도 장수현 성씨조에 보면 본현 황씨(本縣黃氏)라고 되어 있으며, ‘황경(黃瓊)의 9세손 공유(公有)가 고려 명종 때 무신의 변을 피하여 고향 장수(長水)로 돌아왔고, 다시 지방 관헌을 피하여 남원(南原)으로 옮겼다. 이어 후손이 이곳에 살았으니 광한루가 그 구기(舊基)다’라는 기록이 있다.
장수황씨는 3세 황희의 아버지 군서(君瑞)까지 독자로 이어져 오다가 4세 황희와 형 중수(中粹)가 비로소 형제가 되었으나 중수는 7세손 이후 절손(絶孫)이 되어 현재 장수황씨는 모두 황희의 후손이다.
조선의 사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방촌(?村) 황희(黃喜)는 고려 공민왕 12년(1363) 개성 가조리에서 판강릉부사 황군서(黃君瑞)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 했으나 이성계 태조의 간청으로 두문동에서 나와 벼슬길로 나아갔다.
조선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네 분의 임금을 모시고, 태종 때에는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쳐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세종 때 69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74년간의 관직생활을 하였고 영의정에만 18년 동안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등 많은 치적을 쌓았다.
황희선생은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파주 사목리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파주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사목리 황희선생유적지 반구정. 방촌선생영당
문산읍 사목리엔 하루 두 번 조류가 밀려오는 임진강 물줄기를 따라 날아오는 갈매기를 벗삼던 정자 반구정(伴鷗亭)이 있다. 이곳은 황희선생유적지가 잘 조성되어 있어 황희선생의 영당, 방촌기념관. 반구정, 앙지대, 황희선생의 고손인 월헌 황맹헌의 부조묘 월헌사와 재직사, 재실, 황희선생의 동상 등이 잘 관리되고 있다. 황희선생의 영당에는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어 매년 선생의 탄생일인 음력 2월 10일에 제향이 올려지고 있다.
탄현면 금승리 황희선생의 묘역 아래 영정각에서는 매년 음력 8월 8일에 시제가 올려지고, 또한 돌아가신 날이 음력2월 8일이라 그 때는 묘역 옆 부조묘(사당)에서 기제사를 지낸다. 예전엔 밤에 지냈으나 요즘엔 낮 정오에 지내고 있다.
황희선생 기제사
2007년 3월 1일 삼일절엔 밤 11시(음력 2월 7일)에 사당에서 4백99번째 기일제사를 지내러 다녀왔던 이연자 한배달 우리차문화원장의 참관기를 통해 황희선생께 올리는 문중 기제사의 형식을 살펴보자.
제사는 예에 따라 자시(子時)부터, 즉 밤 10시부터 문중 여인들이 준비한 제물을 제집사들이 사당에 있는 제상에 진설하기 시작했다. 종가에서는 제주로부터 첫줄로 쳤다. 왼쪽부터 대추를 시작으로 밤, 배. 감. 사과 순으로 올렸다. 그 옆으로 유과와 산자도 있었다. 그 다음 줄에는 왼쪽부터 명태.대구.문어 등 세 가지 포를 담은 제기를 놓았다. 그 옆으로 다시마채를 고명으로 올린 숙주나물이 놓였고, 청장과 나박김치, 식혜는 건지만 담고 고명으로 씨를 바른 대추를 절반으로 쪼개 세 개 올렸다. 그 다음 줄에는 화양전. 누름전, 고기전, 두부전을 각각의 그릇에 담아 놓았다. 다섯 가지 탕은 건지만 담았다. 넷째 줄에는 적을 올렸다. 숭어 한 마리. 쇠고기 적, 맨 위에는 온 마리 닭을 쪄서 놓았다. 떡은 인절미를 우물 정(井)자로 일곱 층으로 쌓아 올렸다. 웃기떡은 올리지 않았다, 달걀 지단을 얇게 부쳐 채를 썰어 국수 대신 올렸다. 다섯째 줄에는 왼쪽부터 수저를 담은 시접 그릇을 놓았고, 그 옆으로 밥과 국 그리고 술잔도 올렸다. 황 정승의 신분에 따라 정경부인 칭호가 내려진 초취부인 최씨와 재취부인 양씨의 밥과 국, 술잔도 가지런히 올렸다.
이렇게 다섯 줄로 놓인 제수품은 음식의 가짓수가 적었고 높이 괴지 않았다.......단촐하고 소박했다. 이는 ‘장례와 제례는 가례에 따르되 형편과 분수에 맞게 하며 모든 일에 겉치레는 일절 삼가라’는 황 정승의 유훈에 따른 jt이라는 게 종손 황두하씨의 설명이다. 종손은 또 “많이 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경과 정성을 다하고 예에 맞게 준비해야 하며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을 올린다”고 했다.
제사 순서는 종가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홀기(笏記)에 따랐다. 제관들이 손을 씻는 의식 외에는 일반적인 제사 순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사 음식에 눈길을 모았던 것은 ‘묻쌈’ 일반적인 고기완자전의 재료인 고기와 두부, 야채를 잘게 다져 양념해 5센티 정도의 길이와 3센티 정도의 폭으로 둥글게 만들어 달걀을 묻혀 구운 것이다. 무를 가운데 두고 둘레에 꽂이로 쌓는 다 하여 '무쌈‘이라고도 한다.
숭어를 조기 대신 올리는 것도 이 댁의 특징이다. 국수 대신 달걀 지단을 채썰어 올리는 것도 특별했다. 한 가지 나물만 올리는 것도 청백리 가문다웠다. 사대부는 다섯가지 탕을 쓴다는 예서에 따랐지만 고기 몇 조각, 명태 한 토막, 홍합 조금. 닭 내장 조금, 구운 두부 몇 조각을 속이 깊은 탕기가 아니라 접시 제기에 담은 것도 이채로웠다. 퇴주기를 모사기(茅沙器) 대신 썼던 것도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불천위 제사라도 기제사는 신주를 모셔와 안채의 정침에서 오시는 것이 일반적인 데 반해 사당에서 기제사를 모시는 것도 이댁의 가풍으로 보였다.
황희선생의 가계(家系)
황희선생은 17세에 판사복시사 최안(崔安)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선생이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최씨 부인은 슬하에 딸 하나를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황희 선생은 스물여섯의 나이에 공조전서 양진(楊震)의 딸과 다시 혼인하여 치신(致身), 보신(保身), 수신(守身), 직신(直身) 4형제를 두었다.
장남 치신(致身) 호안공파(胡安公派)
맏아들 치신(致身)은 1397년(태조 6)년에 태어나 1484년(성종 15)에 87세로 졸했다. 아버지 황희가 90세까지 살았고 어머니 양씨가 83세까지 산 것을 보면 치신도 장수집안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평균나이는 45세 전후이었으니 거의 두 배의 수명을 누린 것이다.
치신은 또한 아들을 9형제나 두었는데 그 중 사장(事長). 사형(事兄). 사공(事恭). 사경(事敬)은 무과에 급제하였고, 사효(事孝)는 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다.
치신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아버지의 관직으로 인한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고려 때부터 있어온 음서제도는 아버지가 5품 이상의 관직에 있으면 그 아들에게 관직을 주는 제도로 조선시대에는 공신이나 2품 이상 관직자에게 음직을 제수하였다. 치신은 1434년 동부승지를 거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윤, 경기도관찰사, 형조,공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세종 26년에 호조판서에 올랐다. 1461년 남의 노비를 빼앗은 혐의로 삭직되었다가 5년 후 동지중추부사로 복관되었으며 후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아들의 관직으로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호안(胡安)을 받아 그의 후손들은 호안공파로 분파하여 세(世)를 이어내려 가고 있다.
황치신의 묘소는 고양시 지축동 지하철 기지 부근 덕수촌에 있다. 고양시 향토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도비 이수의 이무기 조각이 매우 아름답다. 비문은 김종직(金宗直)
이 짓고 안침(安琛)이 썼다.
금승리 장수황씨 묘하대종중회
황희선생의 묘가 있는 탄현면 금승리에는 치신의 차남 사장(事長)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려 누대를 살고 있으며 광탄면 용미리에도 치신의 차남 후손들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이밖에 호안공파 후손들은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대전리, 충남 보령군 웅천읍 구룡리, 소황리,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전북 남원시 사매면 수월리, 전북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등으로 분기해 나가 동족마을을 형성했다.
파주의 금승리 황희선생 묘역 아래 치신의 후손들이 오랜 세월을 거주해오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는 문중의 사패지 관리 때문이기도 하다. 금승리 장수 황씨 문중의 사패지는 예전에는 장수황씨 선영을 중심으로 50만여 평이나 되었으나 군부대가 들어와 정부에 땅이 수용되고 현재는 10만여 평 남아 있어 종중 땅 관리를 위해 일제 말기 때 ‘장수 황씨 묘하 대종중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이 집안의 종손 황두하(黃斗夏 77세)는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종중의 회의가 있거나 묘역을 돌볼 때나 제사가 있을 때 수시로 내려오고 있다. 종손으로서 어려운 점에 대해 질문하니 “종토(위토)에 대한 세금부담이 크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어 접빈 비용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제사가 있을 때나 벌초, 청소를 할 때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치 않아 연세드신 종인들과 하려면 힘이 들어서 젊은 종인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황희할아버지 묘소가 봉분 위 떼가 헐어져 버리거나 보수가 필요할 때 시청에 요구를 하면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보수가 제 때 안될 때가 많다.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속도 모르고 종중과 종손만 원망하는데 그럴 때는 정말 안타깝다.”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이곳의 보수가 좀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호안공파의 인물
황정욱(黃廷彧 1532~1607)
황정욱은 치신의 6세손으로,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로 올라 1584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와 그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면서 대제학이 되었다.
황정욱이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 주청을 한 내용은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태종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있고 고려조의 네 왕, 즉 공민왕.우왕.창왕.공양왕을 시해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로 잡아 수정해줄 것을 요청하러 간 것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른 주청사가 다녀왔지만 수정되지 않았던 것을 황정욱이 성사시키고 돌아오자 선조는 200여 년 동안의 묵은 숙제가 해결되었다고 그를 1등공신에 임명하고 부원군에 책봉하기까지 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정욱은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으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이때 왜군의 장수 가토 기요마사는 황정욱에게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황정욱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혁(赫)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하였다. 한편, 그는 항복 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이것은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황정욱은 석방되었으나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죄로 길주에 유배되었다. 4년 뒤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문장, 시, 서예에 능하였고,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후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혁(黃赫 1551~1612)
황혁은 황정욱(黃廷彧)의 아들로 기대승(奇大升)의 문인으로 우승지를 지냈다. 1591년 선조 때 좌의정이던 정철이 선조의 여러 왕자 중에서 왕비 소생이 없고 후궁 소생 왕자들만 있자 후에 어려운 상황을 방지하고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야 한다고 선조임금에게 건의를 했다. 정철은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유성룡과 함께 의논한 후 선조에게 건의한 것인데 동인인 이산해는 선조의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정철이 죽이려 한다고 모함을 하여 서인 정철을 내치게 된다. 정철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외지로 내쳐 갇혀있는 벌(위리안치)을 받게 되는데 황혁이 그 일당으로 몰려 삭직되었다. 그 후로 또 1612년 순화군의 아들 진릉군(晉陵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투옥되어 결국 옥사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어 좌찬성에 추증되고 장천군(長川君)에 봉하여졌다. 저서로 『독석집(獨石集)』이 있으며 이들 부자(父子)의 묘는 탄현면 금승리에 있다.
근현대 인물에는 월롱면 위전리 출신의 제3기갑여단장과 제20기계화사단 부사단장, 6군단 부군단장, 육군기갑학교장을 역임한 황인모(黃仁模 1936~2002)와 탄현면 금승리 출신의 제6대 고양파주지역 국회의원을 역임한 황인원(黃仁元 1920~1978), 그리고 전 총무처장관을 역임한 황영하(黃榮夏) 등이 있다.
차남 보신(保身) 소윤공파(小尹公派)
황희선생의 둘째 아들 보신(保身)의 소윤공파(小尹公派)후손들은 황희선생유적지가 있는 파주 문산읍 사목1.2.3리와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경북 경산군 안심읍 동내동, 경북 문경군 산북면 대하리,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등지에서 세계(世系)를 이어가고 있다.
보신은 종친부의 정4품 관직인 전첨(典籤)을 지냈으며 경북 상주지역으로 이거해갔는데 그 이유는 부인 남양홍씨가 이모부 김자구(金自久)장군의 재산을 상속받아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내용은『방촌선생문집(?村先生文集)』에서 김상정(金相定)이 쓴 「중산행(中山行)」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부터 전하기를 직제학 홍여강(洪汝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떠나게 되어 익성공〔황희〕을 찾아와서 지금 다른 사신들은 다 자녀의 혼사를 마친 사람으로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저는 외동딸을 김장군〔金自久〕의 집에 맡겨 부양하고 있다고 하소연하자 익성공이 ‘국사가 긴급하여 다시 변경할 수 없으니 일단 떠나도록 하라. 그대의 딸을 나의 자식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하마’고 위로하였으니 아들이란 소윤공〔小尹公 保身〕을 말함이오. 김장군은 수만의 재산이 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전부 소윤공에게 물려 주었으며 황씨의 한 파(派)가 이로부터 중산(中山)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下略)
이렇게 부인 남양홍씨 이모부의 재산을 상속받은 보신은 중산, 지금의 경북 상주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세거하게 되었으며 사후 묘역도 이곳에 있게 되었다. 현재 종손도 물론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황희선생의 관대와 옥서진. 산호영. 옥벼루 등의 유물도 보신의 손자 정(珽)이 보관하고 있다가 아들 사웅(士雄)에게 물려준 후 현재 상주의 종택에 보관되어 있다. 이 유물은 원래 장남 치신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관중 남의 손에 넘어가거나 분실되기도 한 것을 차남 보신의 후손 정(珽)이 모두 찾아와 장남 사웅에게 맡겼던 것이다. 파주 사목리 황희선생유적지 내 방촌기념관에도 황희선생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물론 이 유물은 복제품이다.
이와 관련하여 방촌기념관에는 정(珽)이 아들 사웅(士雄)에게 재산을 별도로 분배한다는 내용을 적은 분재기가 있어 내용을 밝힌다.
홍치13년 경신(서기 1500년) 9월 17일
아들 사웅에게 별도로 지급하는 글
너는 종가의 아들로서 자못 글재주가 있어 장차 큰 뜻을 이루기를 기대하니 나의 마음이 기뻐서 별도로 지급하지 않을 수 없구나.
증천사람 정남이 짓고 있는 논 14마지기, 같은 곳 김원이 짓고 있는 논 5마지, 산양현 내에 오금이 짓고 있는 논 6마지기, 증조(방촌)께서 손수 쓰시던 옥서진 1쌍. 산호갓끈 2줄, 옥벼루 1좌, 쇠고리혁대 1거리를 특별히 따로 주거늘 상국(相國)의 유물은 이 몇 점의 보물뿐이니 종가에 잘 보존하여 잃어버리지 말도록 하고 후일 다른 자손 중에 이를 두고 다투는 자가 있으면 이로써 변정하여라.
재주(재물의 주인) 부(父) 황 정(黃 珽)
전북의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는 보신의 맏아들 우형(友兄)의 증손 징(澄)이 낙향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진안군 화산동에는 장수황씨 문중에서 1927년 음력 9월 10일에 건립한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있다. 이곳에는 황희선생을 비롯하여 황보신(黃保身), 황징(黃澄) 세 분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헌종 10년 (1844년) 상주 옥동서원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북 유형문화재 129호로 지정되었다.
소윤공파 후손이 사목리에 입향(入鄕)하게된 원인
사목리에는 황희선생의 둘째 아들 보신(保身)의 후손들이 지금 46호가 누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다. 6? 25전쟁 이전에는 100여 호가 살고 있었다고 하나 전쟁이후 외지로 나간 집들이 많고,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본 집도 있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반구정이 있는 사목리에 보신(保身) 후손이 본거지를 둔 유래에 대해서는 장수황씨 사목종중에서 펴낸 『반구정 요람(伴鷗亭 要覽)』에 후손 호연(湖淵)이 쓴 내용을 보면 대략 알 수가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1615년~1620년쯤 황맹헌의 증손 승지공 간(侃)이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 유폐사건 당시 화를 피하여 개성 송악산 근처에서 은신생활을 하다가 방촌 황희선생의 유적지인 사목리로 옮겨와 피신은거하다 그 후 1623년 3월 복권이 된 후 정착한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장수황씨 족보에 기재된 간(侃)에 대한 내용을 보면 광해군 때 인목대비 친아버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부인(夫人) 광주노씨와 간(侃)의 어머니가 숙질지간(叔侄之間)이다.
1613년 인목대비 아들인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고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도 사사되었다. 그리고 그 죄를 추론하여 연흥부원군은 부관참시(무덤에서 관을 꺼내 시신의 목을 베는 형벌)까지 당하고 어머니 광주노씨는 제주에 유배되어 관아의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1618년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었고,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이와 연루되어 간侃)은 난을 피하여 방촌 황희선생의 출생지인 토산용암(兎山龍岩)으로 가서 은거하다 반구정 마을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토산용암’이라는 곳은 고려 때는 개성에 속하였으나 조선시대는 황해도 토산현 용암이라 하였으며, 용암은 황희선생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물이 말랐다는 용암폭포(현 송악산 박연폭포) 소재지를 말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와 연흥부원군이 복권되자 간侃)도 복권되어 사복시정 관직을 받고 아들 극후(克厚)는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었으며,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목리 마을에는 간侃)과 더불어 조부 협(協)과 부친 예원(禮元)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간(侃)의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경북 상주에서 선조의 유골을 모시고 파주 사목리에 이장하였다고 한다. 묘를 이장하는 것은 풍수적으로 장소와 시점을 잡는 것이 까다로운 일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난을 피해 은신처로 오면서 선조의 유골을 모시고 사목리로 들어왔다는 것은 상황이 매우 긴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 간侃)의 부인 남양홍씨의 숙부 김제남 부원군이 사사되고 부관참시까지 되는 것을 보고 급히 선조의 유골을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수 있겠다.
소윤공파 인물
황맹헌(黃孟獻 1472∼1535)
자는 노경(魯卿), 호는 월헌(月軒). 보신(保身)의 증손으로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사인에 올랐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어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장원군(長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대사헌을 거쳐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형조·공조·예조의 참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1519년 조광조(趙光祖) 등에 의해 정국공신의 호가 외람되다고 지목되어 훈적(勳籍)에서 삭제되고 선산부사로 좌천되었다.
마침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고 그 일파인 김식(金湜)이 선산으로 귀양왔다가 도망하게 된 책임으로 공훈이 1등급 감하여졌고 1524년에는 경상도관찰사로 특제되었으며 곧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 옮겼다.
이듬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성부판윤에 올랐다가, 앞서 강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송(詞訟)에 사사로운 인정을 베푼 혐의로 경기감사로 전직된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공신에 올랐기 때문에 불천지위을 받아 사목리 황희선생유적지내에 부조묘가 있어서 지금도 기제사를 올려주고 있다.
황양열(黃良說)
호는 관해觀海이다. 소양공昭襄公 맹헌黃孟獻의 후손으로 벼슬은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어버이가 병환에 들자 정성껏 시병하면서 하늘에 쾌유를 기원하였고, 돌아가자 백발노인의 몸으로 3년을 여막에서 시묘한 후 평생 흰옷을 입어 애도하였다.
근현대 인물로는 항일독립운동가로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황장연(黃長淵 1923~2008)과 초대 파주군교육청 교육장을 역임하고 금촌초교 교장을 지낸 황호연(黃琥淵 1904~1974), 그리고 현재 파주시 국회의원 황진하(黃震夏, 1946~)씨가 소윤공파 후손이다.
삼남 수신(守身) 열성공파(烈成公派)
방촌의 셋째아들 수신(守身)은 1407년(태종 7)에 태어나 1467년(세조 13)까지 살았다.
1423년(세종 5) 사마시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한 후 문음으로 종묘부승(宗廟副丞), 사헌부감찰, 좌승지를 거쳐 1446년 조선이 세워진 후 처음으로 문과 출신이 아니면 제수되지 못한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1451년 병조참판이 되어 수양대군을 도와 진법의 상정(詳定)에 공헌하였다.
아버지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452년(단종 즉위년) 기복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1455년(세조 1) 우참찬에 제수되었다. 그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작성한 경상도 웅천현(熊川縣)의 지도를 올리면서 비방책(備防策)을 건의하고, 세조 등위에 끼친 공로로 좌익공신에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57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우찬성에 오르고 1462년(세조 8) 좌찬성으로서 『경국대전』의 제2차 초안 작성에 참여하였으며, 우의정이 되어 명나라 헌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왔다.
1467년 영의정에 올라 세조의 명으로 『법화경』, 『묘법연화경』의 언해(諺解)를 주관하였으며, 1465년(세조 11)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을 찬진하였다.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열성(烈成)이다. 탄현면 금승리 부친 황희선생 묘역 맞은편 산등성이에 묘가 있다.
수신의 열성공파(烈成公派)후손들은 전남 보성에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또 전남 승주읍 신전리 약 70호중 절반 정도가 장수황씨 열성공파이며, 등계리에도 황씨가 대부분이다. 전북 무주군 부남면 유평리, 전남 장흥군 대덕면 덕산리 등지에서도 터를 잡아 누대를 이어가고 있으며, 수신의 묘역 아랫마을에도 후손이 두 집 정도 있고, 문산읍 사목리에도 일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전 아나운서 황인용(黃仁龍, 1940~)씨가 열성공파 후손이다.
사남(四男) 직신(直身)
직신(直身)은 오위(五衛)에 두었던 정5품 서반 무관직인 사직(司直)을 지냈으며, 서자로서 일찍이 전남 보성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인근의 대원사(大元寺)에 영당을 짓고 황희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여 병화(兵火)를 피하려고 하였다. 후손은 대를 이어가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목리 방촌영당 영정봉안의 내력
사목리 황희선생유적지 내 방촌영당은 사목리 입향조 간侃)의 형인 수(脩)가 살던 집터였다. 수(脩)는 맹헌의 동생 윤헌(允獻)의 증손자로 양자를 갔다. 수(脩)가 1632년에 화공을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으로 보내어 구본(舊本)에서 모사하여 영정을 집안에 보관하였다가 1635년 영정각을 창건하여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난을 피하기 위해 상주로 다시 옮겨 봉안하였다.
그 후 1727년(영조3년)에 후손 선(璿)이 영남관찰사로 있을 때 두 본을 모사하여 전북 장수 창계서원(滄溪書院)과 파주 반구정 영당에 옮겨 봉안하였다. 1746년에는 영조가 반구정 영당에 봉안된 영정을 가져오라 하여 감상하고 나서 손수 제문을 지어 좌승지 남태온(南泰溫)을 보내어 영당에 제사에 쓸 제물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 영정은 1748년에 다시 분실되었고, 1850년(철종원년)에 방촌의 7대손 수(脩)가 상주로 옮겼던 영정을 종인(宗人)이 다시 찾아 반구정 영당을 중수한 후 영정을 이봉(移奉)하였다. 그 후 25년 후 1875년(고종 12년)에 영정을 다시 똑같이 그려서 봉안하였고, 이후 1918년 4월 15일과 1934년 3월에 각각 다시 그려 봉안하였다.
1941년에는 쇄락하여 무너진 영당을 중건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영당을 비롯하여 반구정, 앙지대, 재실 등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1962년 전란으로 소실된 영당을 사목리 후손들이 힘을 모아서 재건복구하였다.
6.25전쟁 당시에 인민군이 영당에 들어가 영정을 칼로 훼손하여 얼굴과 목부분이 칼로 찢어진 것을 종중 유사 황달연(黃達淵)씨가 피난할 때 영정을 모시고 대구로 남하하여 장남 인표(仁杓)에게 영정을 맡겨 두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인표가 서울 종로구 필운동 자택에 봉안하였다가 영당이 재건되면서 비로소 영정을 봉안하였다.
1976년 8월 31일 방촌영당이 경기도지방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고, 1989년 9월30일 종중운영위원회에서 훼손된 구영정(舊影幀)을 남정식(南晶植)화백에게 모화(摹畵)하게 하여 다시 봉안하였으며, 옛영정은 보존처리를 하였으나 자세히 보면 아직도 얼굴과 목 부분에서 훼손된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사목리 후손들이 그동안 보관하고 있던 황희선생의 영정 3기는 지금 세 박물관에 보내져 보존처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1990년 4월에 문중운영위원회에서 1918년 모화한 방촌선생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여 유물 제35374-839호로 접수, 문화재로 영구히 보존관리 진열하고 있으며, 1632년에 모화한 영정은 1997년 9월 11일 서울시립박물관에 보내졌고, 1875년에 모화한 또 하나의 영정은 1998년 2월 14일에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하여 보존처리 후 전시하고 있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있는 황희선생의 영정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첩책(帖冊)속에 잘 모셔져 있고 두 번째로 오래된 영정은 1775년에 모화한 것이다. 1844년 헌종 때 상주의 종인(宗人)이 또 한 본을 모화한 것이 지금 옥동서원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 영정의 원본은 1424년(세종6)에 그려진 것으로 62세 때의 얼굴 모습이며, 홍여하(洪汝河)가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