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의와 효행이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강릉 김씨 감무공파. 동원군파 문중
권효숙
시조(始祖) 김주원(金周元)
강릉 김씨(江陵 金氏)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5세손이다. 그는 777년(혜공왕 13) 시중이 되었고, 785년 (선덕왕 6)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여러 신하들의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하지 못하게 되자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즉위를 포기하였다.
이에 원성왕이 즉위하니 그가 내물왕의 12대손 김경신이다. 그 후 원성왕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강릉으로 은거하자 원성왕은 그의 겸손함에 감복하여 명주군왕으로 봉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항거하다 왕건에게 설득을 받고 왕건에게 협력하여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대광(大匡)에 오르고 왕씨 성을 하사 받았으나 조선개국 후 왕씨가 탄압을 받자 원래 성인 김씨로 환원하였다.
시조 강릉군 김건(金鍵)은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외손으로 강릉군에 봉해졌다. 강릉김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고, 다른 하나는 김건(金鍵)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다. 이 두파를 구분하기 위해 김건의 강릉김씨를 후강릉김씨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역대 강릉김씨 인물
고려조 예종때 평장사를 지낸 김상기(金上埼)와 김인존(金仁存), 조선초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으로 율곡이이가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했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조선 후기 숙종과 영조 때 대사헌. 예조판서를 지낸 김상성(金尙星), 조선 영조 때 사관과 정언을 지낸 김상집(金尙集)과 역시 영정조 때 한성부판윤, 대사헌, 도승지, 이조? 병조? 형조? 예조? 공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김상철(金尙喆) 과 대한제국 때 호를 이상(李箱)이라 한 시인 김해경(金海卿)도 강릉 김씨이다.
파주의 강릉김씨 입향
강릉 김씨가 파주에 입향한 시기는 고려 공민왕 때 감무공 김윤남(金允南, 1361년생)으로 부터이다. 윤남은 호는 운암(雲巖)으로 공조판서 추(錘)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공민왕 때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 큰 공을 세운 충의지신의 업적을 남겼으나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 별세하자 윤남도 조선 개국 후 낭천감무(狼川監務)의 벼슬을 버리고 오리곶면 내포리(현 문산읍 내포리)에 은거하였다.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의 쇄망을 한탄하여 그 이후 이 산을 국사봉(國思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윤남의 후손들은 국사봉 아래 월롱면 능산리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려 세거해 나갔으며 윤남의 증손 23세(世) 사기(士奇, 1517년졸)는 창녕 성씨 성담수의 사위인데, 사육신 사건의 여파로 진사에 머물렀다.
그의 동생 사희(士熙)의 손자가 파주 사족의 핵심인물의 하나인 장포공(長浦公) 김행(金行, 1532-1588)이다. 김행은 뛰어난 덕행과 학문, 그리고 효행으로 이름난 인물이다.
장포공파(長浦公派)로 분기한 김행의 후손들은 내포1리 장포마을에 거주하며 세계(世系)를 이어나가고 있다. 효자 김성중(聖重)과 김규를 배출한 능산리의 감무공파의 입향조 윤남의 묘는 문산읍 내포1리 산 24번지에 있으며 내포1리 장포공파 후손들은 예전에 많이 모여 살았을 때는 45호 이상이었으나 최근엔 외지로 많이 나가 9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월롱면 능산리에는 후손들이 26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집안에는 각기 1726년과 1788년에 당시의 4개군 지역 유림(儒林)들이 대거 참여하여 작성한 등장(等狀) 문서가 있는데, 30세 김성중(金聖重, 1665-1728)과 31세 김규(金?, 1699-1739)에게 효자 정려를 내려달라는 소장(訴狀)이다.
적성면 두포리 밤고지 마을에는 강릉 김씨 한림공파가 15세기 후반부터 정착해서 거주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30여 호 이상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지만 지금은 6가구만 거주하고 있다.
DMZ 안에 유엔군중립국사무소 관할 아래 있는 대성동 마을에는 강릉 김씨 동원군파 후손들로 이루어진 집성촌이 있다. 동원군은 시조 김주원으로부터 26세(世) 김철명(金哲命)인데 아버지 김광열(金光?)과 함께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당진에 묘가 있다고 한다.
대성동 마을의 강릉 김씨는 효자 정려문을 받은 김정주(金廷?)를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4명으로부터 후손이 퍼져 오늘날의 대성동 강릉 김씨가 되었다. 예로부터 ‘태성 강김’이라고 불리웠는데 마을에는 현재 강릉 김씨가 14~15호 정도 있다. 김정주의 묘는 군내면 조산리 986번지에 있다. 1750년에 조성된 묘역에는 묘표에 1771년 효자 정려문을 하사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문은 전쟁 때 없어졌다고 한다.
동원군 26세(世) 김철명(金哲命)으로부터 27세 수종(守宗), 28세 만성(萬成), 29세 일범(一範), 30세 극경(克慶), 31세 성선(聖善), 32세 정주(廷?, 효자 정려문), 33세 정주 네 아들 ? 영우. 영두. 영기. 영정으로 가계가 이어지는데, 28세 만성(萬成)부터 이 곳에 묘가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는 강릉 김씨가 파주시에 420가구 1,33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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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 시제
내포리 감무공파 시제일은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로 정했으며, 시조인 한림공翰林公 굉?의 제사는 강릉에서 4월 20일에 지낸다. 제물차림은 제사자 위주로 서쪽을 높여 조율이시, 서두동미, 좌포우혜, 외탕내적, 4적 3탕으로 진설하되 과일은 짝수로, 동물은 홀수로 놓는다.
대성리 동원군파 선산은 진서면 어룡리 일대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보름에 모여 시제를 지내오고 있다. 요즈음은 평일에 모이는 것이 어려워 10월 보름 전 일요일에 하고 있다. 시제에는 대략 후손들이 50여 명 전후로 참석하는데 마을에 거주하는 강릉 김씨 후손들과 외부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함께 모인다.
시제는 처음에는 선산에서 산소마다 찾아다니며 제물을 차려놓고 지냈지만 지금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지낸다. 종손이 있지만 마을회관에서 이 마을에 살고 있는 강릉 김씨 며느리들이 모여 함께 제물을 준비하고 있다. 경비는 종친회에서 부담하고 있다.
산신제부터 지내는데 마을회관 옥상에서 간단히 주,과,포 정도만 마련하여 지낸다.
시제를 받는 신위는 강릉 김씨 시조 김주원으로부터 계산하여 27세손인 수종부터 시작하여 37세손까지 모두 182신위다. 6개의 액자로 나누어 신위를 적어 지방을 대신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지방을 불사르는 의식은 없고 잘 보관해두었다가 다음 시제에 다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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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의 강릉 김씨 인물
김윤남(金允南)
? ~ 1361년(공민왕 10)
고려말 조선 초기의 인물로 호는 운암(雲巖)이다. 공부상서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공민왕 때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 큰 공을 세운 충의지신의 업적을 남겼으나 고려 말에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장단(長湍)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다 별세하자 김윤남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낭천감무(狼川監務)의 벼슬을 버리고 송악산을 마주보는 임진강 건너 파주 오리곶면 내포리(현 문산읍 내포리)에 은거하였다.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의 쇄망을 한탄하여 그 이후 이 산을 국사봉(國思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에 우계 성혼이 김윤남의 절의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니 그는 이미 죽었다 하였고 이름을 버리고 숨어 삶이 마치 태어나지 않음과 같게 하였으니 그 절의는 무덤 속에 들어 아는 이 없으나 지금도 도도히 흐르는 임진강 물 같더라.’ 고 기록되었다. 고려통일대전에 봉안되었으며 묘는 문산읍 내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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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金湘)
1453년(단종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공부상서 추(錘)의 손자이다.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품계를 받았으며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를 역임하였다. 묘는 월롱면 능산리에 있다.
김행(金行)
1532년(중종 27)~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이다. 조부 사희(士熙)는 진산군수(珍山郡守)이고 아버지 국봉(國棒)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어려서 백인걸(白仁傑)과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수침은 성혼(成渾)의 아버지인데 그는 성혼과 동문수학하고 평생 형제처럼 지냈다.
벼슬은 내직으로 전적, 형조좌랑, 호조좌랑, 예조정랑, 한성부서윤, 사성, 사도시정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무장현감, 고양군수, 서천군수, 양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하여 주로 외직에 머물고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필법이 호장활동하다는 평을 들었고, 1575년(선조 8)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안평대군의 「증도가(證道歌)」를 보완하여 간각(刊刻)했다. 또한 무예와 지략에도 뛰어나서 1588년 광주목사로 있을 때 순변사 신립(申砬)이 그를 천거하여 전라도병마절도사의 물망에 올랐으나 곧 죽었다. 장보포 서쪽에 택지(宅址)가 있었으며 문산읍 내포리에 묘가 있다.
김성중(金聖重)
1665현종 6~1728년(영조 4)
조선시대 후기의 인물로 효자로 유명하다. 자는 희천(希天)이다. 효자 규의 아버지로 파주 월롱면 출신이다.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던 노모가 꿩고기를 먹기 원하자 이를 구하기 위해 산곡을 헤매었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이에 하늘에 기원하였더니 개가 숲속으로 뛰어 들어가 꿩을 물어다주어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었다. 후에 다시 꿩고기를 원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는데 하늘을 날아가던 독수리가 꿩을 떨어뜨려주어 이로써 효험을 볼 수 있었다. 병세가 위급하여서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는 효행을 실천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슬픔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정도였다. 3년여를 시묘하면서 일체의 소채와 염장을 멀리하고 미음으로만 연명하였다.
이에 향당에서는 그 효행을 칭송하여 조정에 포상을 청하는 계장을 품의하였고, 조정에서는 정려지각을 하사하는 한편 1743년(영조 19) 통선랑 사헌부지평의 증직을 내렸다.
현석 박세채의 문인으로 4군의 유생 225인의 『효행 발천문』이 군지에 기록되어 전한다.
김규(金 矢 見 밑에 木)
1699년(숙종 25)~1739년(영조 15)
조선시대 효자로 자는 사원(士園)이다. 월롱면 출신이며. 아버지는 성중(聖重)이다.
그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지극한 효성으로 봉친하는 데 그 뜻을 두었다. 집안이 빈한하여 부모의 끼니조차 마련하기 어렵게 되자 돗자리를 짜서 끼니를 준비하였다. 모친이 병으로 고생하자 정성으로 시병하였고, 위독해서는 단지 관혈하는 효행을 실천하여 3일간이나마 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효성이 남달라 파주, 고양, 양주,장단 유생 197명이 연명으로 효행발처문을 만들어 전하고 있다. 양대가 같아 양세효자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향당에서는 그 효행을 칭송하여 조정에 포상을 청하는 계장을 품의하였고, 이에 정려지각을 하사받았다. 능산리에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