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의 태두 안향의 종가
순흥 안씨 판서공파
권효숙
1654년에 후손 순원군 응창(應昌)이 의성현감에 부임하였다가, 시조의 제사가 단절되고 선조들의 유적이 없어진 것을 보고 종친들의 협력을 받아, 순흥 평리촌(현 석교리 203번지)을 고택유지로 추정하고, 시조공과 아들 태사공 안부(安孚)의 제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이후 방계의 자손들의 제단과 합해졌다가, 1988년에 순흥 읍내리 비봉산 아래에 새로이 추원단(追遠壇)을 조성하여 설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일 전국의 후손 2천여 명이 참배하고 세사를 올린다.
안씨의 본관은 순흥(順興), 죽산(竹山), 광주(廣州), 강진(康津), 탐진(耽津), 신죽산(新竹山), 경주(慶州), 안동(安東), 수원(水原), 평안(平安), 순천(順川), 공산(公山), 태원(太原) 등 41개다.
안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는 19만7668가구에 총 63만77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전체 성씨 인구 중 17위로 1.4%다. 그중 순흥 안씨는 14만5254가구에 총 46만882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전체 안씨의 73.5%에 달하는 수치이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白?正)과 우탁(寓倬), 권보 등 훌륭한 유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안향은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안자’라고 일컬어졌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향의 사당 안자묘(安子廟)가 있다.
안자묘는 처음에 순흥안씨 종가가 있던 개성에서 모셔지다가 종가가 옮겨진 파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부조지전이 재개 된 서울 도동(남산아래)과 황해도연백을 거쳐 지금의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에 안자묘를 중건하였다.
문성공의 사우는 개성에서 모셔진 이후 종가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전기 순흥안씨 종가가 파주에 있었다는 것을 1525년에 쓰여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齋叢話)』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권 3의 내용 중 성현의 외가 쪽 선조인 문성공(文成公) 안향에 대한 언급과 순흥안씨 일가가 파주를 개척하여 밭이 수만 경이요, 노비가 백여 호에 이르며 번창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문성공의 손자 목(牧)이 파주에 정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안목은 문성공의 종손이므로 문성공의 사우도 파주에 모셨을 것이다.
이후 조선 초기에 서울 지금의 회현동과 필동 남산 인근 훈도방 주자동(鑄字洞)으로 종택을 옮겨 1650년 경까지 건재하였다. 이 사실은 선조 때 재상 권희(權僖)가 쓴 『주자동지(鑄字洞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이후 사우가 사라졌다가 영조 41년(1765) 서울 도동(남산 아래)에 다시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이후 종가가 황해도 연백군 백천으로 이주하자 화성면에 부조사우를 중건했다. 1947년 종손 재찬씨가 신주를 모시고 월남하여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사우가 옮겨져 안자묘가 건립되었다.
1917년 공자(孔子) 76대손 공영이(孔令貽) 선생이 문성공 안향의 신도비명을 찬(撰)한 내용에 ‘안자(安子)’에 대한 내용이 있다. 기록상 ‘안자(安子)’라는 칭호는 공영이 선생이 쓴 신도비명의 내용 중 처음 등장한다.
이후 1924년 조선총독 사이또(齊藤)가 안자묘에 치제를 올리러 와서, ‘안자묘 대정 13년 2월 15일 조선총독 사이토(安子廟 大正十三年二月十五日 朝鮮總督齊藤實)’라고 현판을 쓰고 갔다. 이를 통해 ‘안자(安子)’라는 칭호가 1924년 이전부터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1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안향(安珦)-안우기(安于器)-안목(安牧)-안원숭(安元崇)-안원(安瑗)-안종약(安從約)-안구(安玖)-안지귀(安知歸)-안호(安瑚)-안처선(安處善)-안정(安珽)이 그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예문관, 홍문관, 집현전에 제학, 대제학을 두어 종신직으로 되어있다. 대제학은 학문의 최고자리로서 타직을 겸임할 수가 있으며 이의 임명은 전임자가 추천을 하는데 학문과 도덕이 뛰어난데다가 그 가문에 결함이 없는 석학, 석유(碩儒)를 추천하면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좌우찬성, 좌우참찬, 육조판서, 한성부윤이 참석하여 다수결로 결정하였다.
순흥안씨는 17명의 대제학이 나왔다. 이중에서 5대를 내려 대제학을 한 집안이 있다. 3파조의 축(軸)의 아들 종원(宗源), 종원의 아들 경공(景恭), 경공의 아들 순(純), 순의 아들 숭선(崇善)이다. 또한 축(軸), 보(輔), 집(輯)은 삼형제 모두가 대제학을 지냈다.
순흥안씨에서 배출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모두 641명이나 된다. 문과에 121명이며, 무과에 91명, 사마시에 327명, 역과에 42명, 의과에 24명, 음양과에 26명, 율과에 9명, 주학에 1명이다.
순흥안씨의 수난
순흥 안씨는 수난을 많이 당한 가문이기도 하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丁丑之變)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辛巳誣獄)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또한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 강점기에 또 한번 어려움을 겪는다.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인데,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순흥안씨 근·현대 인물순흥안씨에서는 근·현대 인물로 독립운동가와 정치가 등이 특히 많다. 안중근, 안창호를 비롯하여 안명근, 안익태, 안재홍, 안춘생 등 숱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안승우는 충주의 황강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을 남겼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선천에서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안명근이 그의 사촌동생이다.
특히 안중근의 순흥안씨 가문은 백범 김구와 깊이 얽혀 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백범 김구를 숨겨주었고, 안중근의 친척인 안미생은 김구의 며느리이다. 하지만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도 순흥안씨 가문이다.도산 안창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한 뒤 평양에 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해 흥사단을 설립하여 대한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고 끝내 침략자의 형벌에 순국했다.
순흥 안씨의 파주 입향과 인물
고려말 조선초기에 안목, 안원 등이 임진강 유역을 개간하여 농장을 크게 경영하면서 별서를 두고 정착하여 후손들이 퍼져나간 순흥 안씨는 개간으로 인해 후손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경우이다.
안향의 손자 안목(安牧, 1290~1360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충숙왕 때 판전교시사를 거쳐 밀직제학· 밀직부사를 거쳐 1352년(공민왕 1) 때 서연관을 지냈다. 황폐하여 사람이 살지 않던 파주 서교지역을 처음으로 넓게 논밭으로 개간하여 농장을 운영하고 크게 저택을 짓고 살았다. 그 현손 안원(安瑗 1346∼1411)에 이르러 가장 넓은 지역을 개간하여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용재 성현의 『용재총화』 3권 「파주서교」 편에 기록되어 있다. 성현의 외가는 순흥 안씨로 안원은 성현의 외증조부이다.
순흥안씨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는 판서공 안종약(從約)이다. 고려명현(名賢) 문성공 안향(諱 珦)의 5대손이다. 부친 경질공(景質公) 안원(瑗)과 영양군부인(英陽郡夫人) 남(南)씨의 장자(長子)로 1355년(공민왕4)에 출생하여, 1388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조선 초에 이조참의에 선발되었으나 즐거워하지 않았고, 해주목사를 끝으로 관직을 물러나서 서원(瑞原, 지금의 파주)의 농막(農幕)에 머물렀다.
파주의 농막은 조부 안목(牧) 대에 황무지였던 파주 일대를 개간하여 농장을 만들고, 부친 안원(瑗)대에 크게 번성했다. ‘순흥안씨 파주농장’은 넓기가 수만 경(頃, 약 일억 평)에 달하고 노비가 사는 집이 백여 채가 될 정도로 큰 농장이었다. 조선 태조가 한양의 경복궁이 완공될 때까지 6개월여를 이곳에서 거처했다는 기록(조선왕조실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규모의 집이 있었을 것이다.
파주 농장에서 가야금을 타고 시서(詩書)로 유유자적하며 세상사를 멀리 하다가 향년 70인 세종6년(1424년) 3월 8일에 일생을 마치고, 교하 아곡방 야동(지금의 파주시 야동동)에 묻혔다.
이후 증손인 판서 안침(琛)과 좌의정 안당(?)의 현달함으로 인해 이조판서로 증직 되었다. 겸하여 경연 등의 지사(知事),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 받았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며,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구(玖)로 직제학이고, 2남은 경(璟)으로 판윤, 3남은 수(琇)로 직장, 4남은 리(理)로 군수이다. 장녀는 성염조(成念祖, 판서)와 혼인하였고, 2녀는 박수지(朴遂智, 현감)에게 시집갔다.
순흥 안씨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은 탄현면 법흥리 싸리고개, 축현리, 광탄면 창만리, 월롱면 덕은리, 위전리, 금촌 야동동 풀무골, 적성면 장현리 등인데 특히 싸리고개 일대에 많이 살고 있고 그 다음은 장현리와 위전리 정도이다. 특히 덕은리, 위전리 후손들은 장단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탄현면 축현리 상골마을에는 찬성공파의 후손들이 세를 이어가고 있다.
찬성공은 안목의 증손인 안종약의 둘째 아들 안경(安璟)이다. 고려 말기인 우왕 14년(1388년)에 태어났으며, 관직은 사헌부의 정6품 검사인 감찰과 여러 고을 수령을 지냈다. 가선대부(종2품)로 한성부윤(2품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70세로 세조 2년(1457) 별세했다.
적성면 장현리의 순흥 안씨는 참판공파로서 안욱(安頊)을 파시조로 한다. 안욱은 약 390년 쯤 전에 군포에서 연천 산골짜기로 당쟁의 화를 피해 들어왔다가 둘째 아들 때부터 파주 장현리 쪽에서 뿌리를 내렸다. 예전에 많이 살 때는 30여 호 정도가 거주하였는데 지금은 외지로 나간 집이 많아 4호 밖에 없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순흥 안씨는 파주시에 644가구 2,168면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주 야동동 풀무골 군부대 안에 9세 한서공 안종약의 묘소가 있다. 작년에 이 곳에서 5공 8부인의 망배제가 올려졌다. 5공이라 함은 4세 문성공 향(珦), 5세 우기(于器), 6세 목(牧), 7세 원숭(元崇), 8세 원(瑗)을 말하며, 팔부인(八夫人)이란 4세 향(珦)의 배위 한남군 군부인(君夫人) 김씨(金氏)와 서원군 군부인 염씨(廉氏), 5세 우기(于器)의 배위 철원군 군부인 최씨(崔氏)와 군부인 이씨(李氏), 6세 목(牧)의 배위 화평군부인 김씨(金氏), 7세 원숭(元崇)의 배위 진한국 대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 8세 원(瑗)의 배위 영양군부인 남씨(南氏)와 파평군부인 윤씨(尹氏)의 8부인을 말한다.
이분들의 묘소는 문성공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구정동 대덕산(大德山)에 있어서 북한 땅 및 군사분계선 안에 있어 9세 종약(從約 : 판서공)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 파주 야동동에서 망배제(望拜祭)를 올리고 있다.
군부대 안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반면에 군인들이 관리를 아주 잘 해주고 있어서 묘역의 보존 상태는 아주 좋은 상황이다.
민통선 안의 진서면 서곡리에 시조 안자미의 3남인 영화의 현손인 안축(軸)의 아들 안종원(安宗源,1324~1394)의 묘소가 있다. 안종원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과거에 급제한 뒤 충목왕 때 사한으로 보임되었다. 이듬해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 초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때 소송 사건을 잘 처리하여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뒤에 시어사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으로 옮기니 관리와 백성이 모두 도망하여 왕이 접대를 받을 수 없게 되자, 그 책임으로 지청풍군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에 승진되었다. 그 무렵 신돈에게 아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참소 당하여 강릉부사로 좌천되었는데,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백성이 생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신돈이 주살된 후 사헌시사를 거쳐 우사의대부에 이르렀다.
우왕 초에는 유순(柳珣) 등과 더불어 환관의 폐단을 논하는 글을 도당에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 우상시를 거쳐 대사헌으로 승진하였다가 판숭경부사가 된 뒤 흥녕군에 봉하여졌다.
1382년(우왕 8) 순흥군으로 봉하여지고 정당문학이 되었다. 이후 최영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하면서 그를 문하찬성사로 기용하여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 뒤 흥녕부원군이 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