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가 볼만 곳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 유적지
이달에 가 볼 곳은 역사 유적지로 정하고, 율곡(栗谷)선생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묘소가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찾아 갔다.
<율곡 이이>
조선시대 한양과 가까웠던 파주에는 역사 유적지가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곳이 성리학의 대가로 잘 알려진 율곡 이이(李珥)의 묘소가 있는 자운서원이다. 율곡선생 유적지에는 율곡의 가족묘와 자운서원, 신도비, 묘정비, 연못, 기념관이 있고, 서원 경내엔 강인당과 동재,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본관이 덕수인 율곡은 1536년(중종 31)에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저술로는‘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동호문답(東湖問答)’‘학교모범(學敎模範)’‘소학집주’‘만언봉사’‘인심도심설’‘자경문’등 그 외 여러 작품이 있으며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율곡에 관하여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십만양병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 선조와 신하들이 토론하는 경연장에서 율곡은 십만양병을 주장하였다.
[선생이 경연에서 계(啓)하여 가로되 국세가 부진함이 심하니, 10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마땅히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 컨데 미리 10만 병을 양성하여 도성에 2만 명, 8도에 1만 명씩을 두어 군사에게 호세(戶稅)를 면해 주고, 무예를 단련케 하여 6개월씩 번갈아 도성을 수비하다가 변란이 있을 때에는 10만을 합하여 지키게 하는 등, 완급의 비(備)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났을 때 훈련되지 아니한 백성을 몰아 싸우게 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때는 일이 모두 틀리고 말 것입니다.] (율곡전서 권33 부록1)
이이의 제자 사계 김장생이 스승의 일생을 추모하며 쓴 <율곡행장>의 일부분이다. 김장생이 <율곡행장>을 쓴 때는 이이가 죽은 지 13년 뒤, 일본이 두 번째 침입한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이다. 이<율곡행장>을 토대로 <선조수정실록>에도 실려 있다. 그러나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고 10년 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율곡은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또한 여성도 하나의 인간이며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그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율곡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의 몽룡실에서 태어났으나, 고향은 화석정이 있는 현재의 파평면 율곡리로 화석정은 율곡의 5대조 강평공 이명신이 세운 정자이다. 율곡(栗谷)은 여기서 취한 호이다. 화석정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있고, 건물 안 쪽에 율곡이 8세 때 화석정에 올라왔다가 지었다는 팔세시부(八歲賦詩)가 걸려있다.
<八 歲 賦 詩 >
林亭秋己晩 騷客意無窮 숲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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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가는 길은 교통이 불편하다.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아 버스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승용차를 타고 가거나 법원읍에서 택시를 타야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경내에 갖가지 나무들이 있어서 철따라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다. 서원과 묘소로 올라가기 전에 율곡의 서체와 신사임당의 그림과 글씨 등, 유물을 볼 수 있는 율곡기념관에 먼저 들려 본다. 율곡 기념관 안에는 1층에 영상관과 디지털 갤러리가 있어서 율곡의 생애를 볼 수 있고, 디지털 갤러리에서는 신사임당의 그림과 글씨, 율곡의 시와 글씨 그리고 율곡의 큰누님 매창의 그림, 막내아우 옥산의 작품을 볼 수 있고, 갤러리 안쪽에는 율곡 일가의 시(詩), 서(書), 화(畵)가 진열되어 있어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신사임당의 유명한 초충도(草蟲圖)를 비롯하여, 율곡이 강릉에서 6살까지 썼던 벼루 뒷면에 정조임금이 글귀를 써 내려 준 것이 있다. 그리고 율곡의 생애를 인형으로 만들어 표현하여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 쉽게 하였다. 그 외에 율곡의 학문과 사상 정치 등을 볼 수 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기념관을 나와 넓은 잔디밭을 지나면 서원으로 올라가는 외삼문이 있다. 서원은 율곡선생이 돌아가시고 31년 후인 광해군 7년(1615)에 창건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높은 대지 위에 세워 진 서원은 효종 원년(1650)에‘자운(紫雲)’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러다가 조선후기인 1868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당시 전국의 서원의 수는 800~1000여 곳이나 되었다고 하며, 때로는 당파 싸움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여, 대원군은 배향된 인물 한 사람의 서원을 한 곳만을 남기고 철폐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에 복원한 것이고, 그 외에 내삼문, 외삼문, 강당과 동재, 서재 등의 건물은 최근에 새로이 신축한 것이다. 사당 내부에는 율곡의 영정이 중심에 있고,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있다. 매년 음력 8월 중정(中丁)에 제향을 올리고 율곡문화제 행사에도 제례를 올리고 있다. 본래 서원의 현판은 1970년도에 복원 할 때, 5공의 실세였던 김종필씨가 쓴 <紫雲書院> 이 걸려 있었으나 다른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 걸어 놓은 현판은 다른 사람이 쓴 <文成祠>라는 글씨를 걸어 놓았다. 김종필씨의 글씨는 새 현판 뒤 쪽에 걸어 놓아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1973년에 경기도 기념물 제 45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2013년에 사적 545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 는 450여년 된 느티나무가 온갖 풍상을 겪어 일부분 썩기도 하고 비바람에 꺾인 상처를 안고서 우람한 자태로 서있다. 4월이 되면 서원 옆에 서 있는 두 그루 목련나무에서 하얗게 꽃이 피어 서원을 환하게 하고 서원 앞 향나무는 비틀리며 자란 형상이 곧은 나무보다 자못 예술적이다.
<신사임당>
신사임당의 묘는 남편인 이원수와 합장한 묘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율곡이 대 학자로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 있고,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예술가였던 신사임당에 가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이‘신인선’인 신사임당은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이원수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았고, 율곡을 훌륭한 학자이며 정치가로, 큰딸 매창은 화가로 막내아들 옥산은 자신을 닮은 종합 예술가로 키워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공부할 기회도 흔치 않았을 때인데, 신사임당은 시(詩), 서(書), 화(畵), 자수(刺繡)를 모두 잘하는 종합 예술가로 현대 여성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신사임당의 그림 중에는 특히 초충도(草蟲圖)가 유명하고,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한시 여러 편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신사임당은 오천 원 권에 실린 아들 율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액인 오만 원 권에 실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알겠다. 신사임당은 지극한 효녀로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려고 강릉 오죽헌에 머물며 율곡을 몽룡실에서 출산 하였다. 율곡이 여섯 살 되던 해에 서울로 가며 읊은 시는 지금도 대관령 고개에 시비(詩碑)로 서 있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고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한발재림영)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두북촌시일망)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묘소 앞에는 봄이면 홍매가 붉게 피어나 사임당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잘라 버려 지금은 그루터기만 남아 있다. 잘려 나간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는 걸 보았는데 그것만은 부디 크게 자라도록 그냥 놔두었으면 좋겠다.
<율곡선생 묘>
우측 산자락에 율곡 선생과 아버지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 묘 등, 가족묘가 자리하고 있다. 한 창 가을빛이 물들어 가고 있는 서원 경내엔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고, 바닥에는 은행 알이 수두룩히 떨어져 나뒹굴며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은행나무의 진가는 11월이면 더욱 빛을 발하는데, 은행나무가 노란 잎사귀를 떨어내기 시작하면 나무 밑은 황금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 폭신하게 깔린 은행잎은 관광객들이 털썩 주저앉아서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며칠만 지나면 묘소로 올라가는 여현문 앞은 온통 황금빛으로 환해 질 것이다.
율곡과 신사임당의 묘소는 80여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가, 돌이 울퉁불퉁 튀어나오게 만든 길을 올라가야한다.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들이나 노인들은 올라가기에는 다소 불편 하겠다. 율곡의 묘는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봉분은 그리 크지 않고 조촐하다. 묘소 배치는 제일 위에 율곡 선생의 묘가 있고 부모님의 묘가 그 아래에 있는 역장 묘이다. 많은 사람들이 역장 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부모님 사후에 시묘살이를 한 효자의 묘가 왜 부모님보다 위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추측이 난무 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이곳을 찾는 역사학자들에게 물으니 조선 중기였던 그 시대엔 역장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부모님 보다 자식이 더 훌륭하면 위로 올라 갈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당상관 이상 가문 중에 이곳 말고도 역장 형태의 가족묘가 많이 있으니 그 말이 옳을듯하다.
<부인 곡산 노씨>
쌍분 묘이기는 하나 부인 곡산 노씨의 묘는 율곡선생의 옆이 아니라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사 이항복선생이 비문을 쓴 신도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 살고 있던 부인이 고향으로 피난을 오며 선생의 신주를 품고 내려 왔다고 했다. 부인이 율곡의 고향인 화석정 아래 율곡동으로 가지 않고 묘소부터 찾아와 신주를 묘 앞에 묻어 놓고 돌아 서는데, 왜놈들이 따라와 큰 소리로 꾸짖다가 해를 당했다고 한다. 장례도 제대로 못 치루고 지금 묘가 있는 자리에 흙만 덮어 두었다가 임진왜란이 끝나자 봉분을 새로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 신도비에는 전쟁이 끝난 후, 율곡의 부인이 왜놈들에게 항거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들은 선조임금이 감동하여 정려((旌閭門)를 내렸다고 써있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역사적 사연이 깃든 자운서원에서 성현의 얼을 느껴 보는 것도 좋겠다. 자운서원 묘정에는 넓은 잔디가 깔려 있어서, 음식을 싸 가지고 소풍 온 가족들이 정답게 둘러 앉아 가을 나들이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엔 그만이다. 기념관 앞에 서 있는 한 그루 낙낙장송이 운치를 더해주고 빽빽하게 주위를 감싸고 서 있는 적송(赤松)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 묘역을 더욱 신성하게 만들고 있다. 11월엔 은행잎 진, 황금빛 융단을 보러 자운서원으로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