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없는 왕릉, 파주 삼릉 (공·순·영릉)
파주삼릉은 조리읍 봉일천리에 있다. 그곳에는 고라니, 멧돼지 등이 살고, 각종 야생화와 새들이 서식하는 아름다운 숲이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은 한 여름에도 그늘을 드리워 산책하듯 걷기에 좋다. 입구에서부터 능을 가로질러 왼쪽엔 공릉, 오른쪽엔 순릉과 영릉이다. 지난 2009년 6월,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것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던 능 가운데 나 있던 길을 막아 능의 권위를 되찾아 놓았다. 숭례문 화재 이후 모든 조선왕릉 능침구역엔 올라 갈 수 없다. 감시카메라에 센서를 부착해 놓아 근처에만 가도 119 자동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온 능역에 울려 퍼져 깜짝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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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된 조선왕릉
2009년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특히 조선왕릉 능 공간은 서울과 서울 주변 도시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도 숲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어, 생태계가 잘 살아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 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519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이어갔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왕릉이라 한다.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는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지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儀物)들은 각기 그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왕릉 조영 절차와 의례절차를 상세하게 기록해 둔 것이 지금도 전해져 오는 데, 이 기록물들은 큰 문화적 가치를 갖는다. 조선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능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각종 제례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고,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따라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 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석인과 무석인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졌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圓)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진(私親: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인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묘를 일컫는다.
세계문화유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계문화유산은 인류의 소중한 문화와 자연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유산이다. 1972년부터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유네스코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거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희귀한, 인류를 위해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산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해오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는 유산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유산의 성격이 혼합된 복합유산 등 3가지의 유형이 있다. 이 가운데 문화유산은 기념물·건조물군·유적지 등 3개의 범주로 구분하고 있다. 기념물에는 건축물, 기념적 의의가 있는 조각 및 회화, 고고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유물 및 구조물, 금석문, 혈거 유적지 및 혼합유적지 중 역사, 예술 및 학문적으로 현저한 세계적 가치와 역사상, 관상상, 민족학상, 인류학상 현저한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는 유산이 속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우리나라의 유산은 석굴암, 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덕궁(1997),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2000), 조선왕릉(2009),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2010), 남한산성(2014)이 있다.
공릉(恭陵)
공릉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1461) 한씨(韓氏)의 추존 능이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의 셋째 딸로 1460년(세조6)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다음해 인성대군(人城大君)을 낳고 1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인성대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데,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고 유년 시절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종이 왕이 되자 1472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세자빈이었을 때 죽은 장순왕후의 공릉은 세자빈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소박하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고 망주석도 생략되었는데, 봉분 앞과 주위에는 곡장, 혼유석, 양석, 호석, 문인석이 배치되어있다. 참도(參道)는 홍살문에서 정자각 기단 앞까지 똑바로 놓이는 것이 상례인데, 공릉의 참도(參道)는 홍살문에서 직선으로 뻗어 나가다가 중간에서 능을 향해 꺾여 정자각 기단에 이른다. 이것은 지형조건(地形條件)에 따른 것으로 이런 굴석참도(屈折參道)는 조선왕릉 중 공릉뿐이라고 한다. 공릉 정자각을 오르는 신계(神階)에 새겨진 문양이 아직도선명하게 아름답다.
순릉(順陵)
순릉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년-1474) 한씨(韓氏)의 능이다. 공혜왕후 역시 한명회의 넷째 딸로 공릉의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다. 1467 년(세조13) 12세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은 소담한 돌기둥에 난간석주(欄干石柱)를 둘렀으며 봉분 앞에 상석과 8각의 장명 등을 배치하고 양쪽으로 문인석과 망주석 2기를 두었다. 또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 2필씩을 두어 능 주위를 호위케 하고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이 있다. 일찍 죽기는 했으나 왕비의 능으로 조성한 순릉은 왕릉의 기능을 잘 갖추고 있다. 성종은 공혜왕후가 죽은 후 우의정 윤호(尹壕)의 딸을 계비로 맞아 들였다. 성종은 계비(繼妃) 정현왕후와 강남의 선능에 묻혔으니 죽어서도 성종과 멀리 떨어져 외로운 넋이 되었다.
영릉(永陵)
영릉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과 그의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쌍릉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 2월 15일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는 창의궁에서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영조가 1724년 즉위하자, 그 해 11월 3일 경의군에 봉해졌다가, 그 이듬해 3월 20일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창경궁 진수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 영조는 40세가 넘어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를 폐 세자 시키고, 그의 아들인 왕세손(정조)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하였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영조의 유언에 따라 효장을 진종으로 추존하였고, 능호도 올려 영릉(永陵)이라 하였다. 효순왕후 조씨는 1727년 13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 효장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37세로 죽으니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을 종식 시키고 당쟁(黨爭)의 폐해(弊害)를 없애기 위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파 간의 정치 세력에 균형을 이루는 탕평책을 펴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강력한 신권(臣權)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냉혹한 아버지가 되었다. 사도세자는 당파싸움의 희생물이 되고 만 것이다. 효자인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였다. 당파싸움에 아버지를 빼앗기고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 되어 왕이 된 정조는, 당쟁의 폐해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
파주 삼릉에는 공릉, 순릉, 영릉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 공릉과 순릉은 예종 비 장순왕후와 성종 비 공혜왕후의 능으로 모두 한명회의 딸이다. 친가에서는 자매 지간이었지만, 시가인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에 예문관 제학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한기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여 공신의 자손을 관리로 특채하던 문음(門蔭) 제도에 의해 38세 때인 1452년(문종 2) 궁을 지키는 일로, 다소 보잘 것 없는 경덕궁직을 맡게 되었다. 궁지기에서 말단관직에 간신히 올랐을 때에는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나이의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이다. 이 때 그는 지인 권람 등을 이용하여 단종의 삼촌이었던 수양대군과 결탁하여,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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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차례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키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일개 궁지기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자매를 나란히 세자빈의 자리에 올려 왕비가 되게 한 한명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굳혀 갔다. 그의 자녀 1남 4녀 중 맏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비, 넷째 딸은 성종의 비가 되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요절하였다. 공릉에 잠든 예종비 장순왕후는 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성종비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절대 권력을 행사해 온 한명회는 네 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록되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두 딸을 먼저 보내고 1487년(성종 18)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폐사에 찬성했던 일로 부관참시를 당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삼릉에는 왕위에 오른 인물이 없다. 왕비와 추존 왕비 그리고 추존왕의 능이 있을 뿐이다. 능을 찍기 위해 삼릉에 찾아 갔던 날, 왕비 능으로 조성 된 순릉을 사진에 담기 위해 삼릉 직원의 허락을 받고 순릉으로 올라갔다. 두 여인을 대동 하고 능을 찍고 나서 골짜기를 따라 더 깊이 들어갔다. 영릉 쪽으로 가는 길 낮은 능선에도 감시 카메라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사람의 침입을 알리는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에구머니나 !”
세 여인은 삼릉 직원이 달려오기 전에 허둥지둥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우리는 뒤 돌아 내려오며 소녀들처럼 웃었다. 숲은 바야흐로 봄빛이 완연하다. 며칠 전 내린 비에 떨어진 산 벚꽃잎이 능침 아래 꽃가루 되어 흩어져 있다. 지금 한창 파릇한 새싹들이 고개를 쏘옥 내미는 중이고, 벌써 아기 손가락만한 버들강아지가 조롱조롱 매달린 나무 가지에서는 봄기운을 한창 피워 올리고 있다. 봄바람에 살랑이는 나무 가지가 곧 푸르러 지리라. 서서히 숲은 연록색으로 변하고 노란색 붉은색으로 치장한 꽃들이 숲을 화사하게 수놓으며 향연을 펼칠 것이다. 봄기운에 이끌려 왕릉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조용한 숲속이 시끌벅적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