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사(龍岩寺)와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고양시 벽제관에서 혜음령 고개를 넘어 가는 길은 옛 의주로 길로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으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던 길이다. 그 길에 용암사와 보물 93호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이 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석물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과 달리, 거대한 불상은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으로 용미리마애이불입상도 은진미륵불과 같은 형태이다. 그러나 은진미륵불은 하나의 석불이고 용미리 석불은 두 개의 석불이 붙어 있어, 거대한 쌍 석불로는 유일하다. 용암사로 쌍석ㅈ불을 보러 가던 날은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찬 기운이 아직 감돌고 있었지만, 바람은 그다지 차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봄기운이 땅 속에서 불쑥 밀고 올라 올 것처럼, 발밑에 밟히는 땅의 감촉이 녹아서 푹신 거리며 부드러웠다.
용암사(龍岩寺)
용암사는 조선시대 국도 1번 길인 의주로 변에 있다. 입구에 절을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석불을 찾아오는 이들이 찾기에 쉽다. 큰길에서 절까지의 200여m 거리는 약간 경사 진 언덕이다. 용암사로 올라가는 산비탈 양쪽으로 나무들이 도열하듯 서 있어, 속세에서의 번잡한 마음에 안정을 준다. 언덕길 중간쯤에 근래에 새로 세운 일주문을 지나면 용암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이곳은 절 보다 보물 93호로 지정된 쌍 석불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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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는 조계종 봉선사의 말사로, 창건 시기를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화와 같은 11세기로 여기는데, 용암사 창건 이후 특별한 사적(事績)은 전해 오는 게 없다. 조선시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고, 전란에 의해 한 동안 소실되었다가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하고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던 절 이름을 용암사로 바꾸었다. 중창 이후에도 화재로 인해 대웅전 등 도량이 소실되어 1946년 다시 삼창이 이뤄진다. 1984년에 대웅전과 범종각을 중수했으나 1997년 대웅전이 다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2001년 복원 불사를 시작하여 2004년 대웅전 불사를 마쳤다. 뜰 중앙에 자리한 5층 석탑은 예전에 대웅전을 중수했을 때 세운 것이다. 석탑 옆으로 요사채와 범종각이 있고, 삼성각(三聖閣)은 석불로 올라가는 왼쪽에 위치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석가여래 3존불을 중심으로 뒤에 석가여래후불탱화가 있고,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佛畵)가 대웅보전 내부를 치장해 주고 있다.
보물 93호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
절 왼쪽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석불입상이 고개를 젖히고 보아야 할 만큼 웅장하여, 멀리 있는 도로에서도 잘 보인다. 전에는 누구나 부르기 편하고 이해하기 쉬운 용미리 쌍석불입상이라고 불렀는데, 현재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인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이라는 한자 표기를 쓰고 있다.
예전부터 익숙하게 써온 쌍 석불입상과 마애이불입상을 같이 사용하며 이글을 쓰려고 한다. 쌍 미륵불은 고려시대에 천연암벽을 이용하여 조각한 거대한 불상으로 천연바위에 몸체를 선각(線刻)으로 처리하고 그 위에 목과 머리, 갓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쌍미륵석불이다.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을 남상(男像)이고, 사각형의 갓을 쓴 방립불을 여상(女像)으로 전하는데, 원립불은 손에 꽃을 쥔 모양으로 목은 원통형이며, 몸체를 감싸고 있는 법의의 양쪽으로 내려진 옷자락의 주름이 섬세하게 표현 되어 있다. 바위의 제약으로 목과 가슴이 자연스럽지 못하지만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이 안동마애석불과 비슷하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불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만 다를 뿐 조각된 왼쪽의 불상과 비슷하다.
선종과 원신궁주의 전설
석불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고려 제 13대 선종(宣宗1083~1094)이 후사를 잇지 못해 3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씨(元信宮主 李氏)를 맞아들였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궁주의 꿈속에서 두 도인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을 주오” 하고 사라졌다. 꿈에서 깬 궁주가 선종께 말하자 선종은 장지산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장지산에 다녀온 신하들이 장지산 기슭에 거대한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더라고 보고하자 왕은 그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했더니, 왕자 한산후 왕윤(漢山候 王?)이 태어났다고 한다.
쌍석불입상에 관하여는 전설에서 밝혀진 것 외에 1995년에 석불의 명문이 밝혀지면서 조선 초기에 제작 된 것일 수도 있다는 논란이 있었다. 방립불 왼편 옷자락에 새겨진 명문은 군데군데 마모되어 알아 볼 수 없는 글자도 있으나, 내용으로 보아 원립불은 세조이고, 방립불은 세조 비 정희왕후를 형상화 한 것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명문이 추기(追記) 되었을 가능성을 들어 기존의 통설이 수정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다시 조선 초기에 조성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으나, 불상의 크기만 보아도 고려 때 만들어진 은진미륵 등, 거대 석불양식을 취하고 있고 전설로 전해 오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왕명(선종)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불상의 조성 년대를 고려시대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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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석탑과 동자상
대웅전 마당에서 석불로 올라가기 전 왼 쪽 삼성각 옆에 작은 7층 석탑이 있고, 그 7층 석탑 옆에는 동자상이 있다. 전에는 7층 석탑과 동자상 가운데 아주 작은 아기 불상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갔을 때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구전에 의하면 고(故)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어머니가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태어났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1954년 10월 이승만 전 대통령 등 각계인사가 용암사를 방문하고 남북통일을 기원하여 7층석탑과 동자승 제막식을 거행 하고, 왼쪽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동자상을, 7층 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 하자, 재야관련 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 했다는 비판이 심하여 1987년 석불에서 떼어냈다. 몇 년 전에는 석불과 동자승이 요사채 뒤에 있어서 역사와 세월의 더께가 쌓인 불탑과 불상을 그렇게 둔 것은 무심한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20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기념표석을 세워 놓아 용암사의 또 다른 역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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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앞뜰에는 또 다른 대통령의 기념물이 자리하고 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朴正熙)이 1군단 방문 길에 이곳에 들려 참배 기념으로 구국통일(구국통일)과 국태민안(국태민안)을 비는 천일기도광명등(천이기도광명등)이라 칭한 석등(석등) 두 기를 세웠다. 그리고 봉덕사종을 본 따서 제작한 범종을 안치한 범종각도 있다.
석불의 뒤통수
석불의 왼 쪽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석불 뒤로 돌아 가보면 목과 머리와 갓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은 것이 확연이 들어 난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 산길이 나 있는데, 약간 가파른 길이어서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숨이 차다. 석불 머리 부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보호 철책이 둘러 쳐 있었지만, 가까이서 사진을 찍으려고 슬쩍 넘어 들어갔다. 앞쪽만 쳐다보고 있는 불상의 뒷머리를 이리저리 여러 번 찍었다.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석모는 갓이라기보다 석등이나 탑의 윗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별다른 장식은 없고 앞에서 보이듯이 얼굴과 목과 갓, 세부분으로 간소하게 표현된 것이 그리 위엄 있어 보이지는 않는 게 친근함을 갖게 한다.
가파른 길은 다시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 바닥이 미끄럽거나 편하지 않은 신을 신고는 절대로 올라가면 안 될 듯싶다. 석불 앞에는 신 벗고 올라 앉아 기도할 수 있는 기도처가 넓게 마련되어 있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 누가 켜 놓고 간 것인지 기원을 담은 촛불이 바람에 일렁이며 타고 있다. 무슨 소원이 그리도 많은가. 죄 많은 중생들이 가슴에 가득한 욕망을 채우려고 비는 건 아닐 터이리라. 어느 누가 소박한 소망이 있어 부처님의 힘을 빌고자 한다면 자비로운 부처의 은혜를 입게 되지 않을까.
-용암사 마애이불입상 찾아가는 길-
버스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이불입상)에서 하차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광화문역(6번 출구), 시청역(8번 출구), 서울역(3번 출구, 9-1번 출구), 서대문역(6번 출구), 독립문역(1번 출구), 녹번역(1번 출구), 불광역(8번 출구), 연신내역(3번 출구),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국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오순희 프로필
1998년 한국수필 등단
2003년 수필집 <그대에게 노란 장미를> 출간
2011~현재 경기도해설사회지 편집 위원장
파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문인협회회원, 파주문학회회원, 한국수필작가회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