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근?현대 인물열전 - 3편
파주가 낳은 한글학자, 독립운동가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 선생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자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아! 8?15해방의 기쁨!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울려 나오는 우리 어린이들의 ‘가갸 거겨’ 소리! 이것이 곧 우리 민족이 다시 살았다는 기쁨의 우렁찬 외침이 아니고 무엇이냐? (중략)
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는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白晝)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
이 땅의 모든 애국자는 다 함께 일어나 우리의 말 우리의 글을 피로써 지키자!”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라는 선생의 글 중에서-
출생과 교육자의 생활
정태진 선생은 1903년 7월 25일 파주군 금촌읍 금능리 406번지에서 부친 정규원과 모친 죽산 박씨 사이의 3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석인(石人),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개신교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개명 ? 개화하였던 선생은 파주의 교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4월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 ?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금촌역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1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기차 통학을 하였다. 여기에서 4년의 수업과정을 마치고 1921년 3월 졸업한 선생은 그 해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이 시절 선생은 6살 위의 동기 동창생인 정인승(鄭寅承)을 만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을 공감대로 하여 서로 깊은 우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선생과 정인승은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 업무도 같이하고, 또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는 옥중에서 고통도 같이 나누며 동고동락하게 된다.
아울러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선생은 국학자이며 실천적 민족주의자인 정인보(鄭寅普) 선생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상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귀국한 후, 1922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한 정인보 선생은 우리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얼’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정인보 선생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연구 전파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나아가 민족독립의 날을 기약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한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선생은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곧 바로 그 해 4월 함경남도 함흥(咸興)에 있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永生女子高等普通學校)의 영어와 조선어 담당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 학교에서 선생의 제자인 소설가 임옥인(林玉仁)은, “정태진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내외의 문학작품, 그 중에서도 주로 우리나라 명시(名詩)를 풍성하게 소개하여 민족의 문화의식을 심는데 애쓰셨다.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고 우리말 교육이 맥을 못추기 시작했을 때였지만,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모국어의 아름다움과 국문학의 정수(精髓)를 접할 수 있었다”라고 술회하는 것처럼 우리의 고전을 소개함으로써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함양하여 갔다.
영생여고보에서의 2년 동안 선생은 자신과 가정도 돌보지 않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녁에 하숙으로 돌아오면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는 으레 하루 생활을 돌아다 보았다. 나날이 포악해져가는 일제의 통치를 생각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다.
5년간의 미국 유학생활과 영생여고보 복귀
그러던 어느날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미국 유학을 권유했었던 빌링스 교수로부터 재차 미국 유학을 권유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편지에는 “일제의 간교한 탄압으로 조선민족이 하루하루 우매에 빠져들어가고 있으니 너만이라도 하루빨리 선진국에 가서 많은것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야 할 것이다. 앞으로 조선에는 더 높은 정신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결국 선생은 1927년 5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우스터대학(Wooster College)에 입학하여 철학을 공부하였다.
선생은 우스터대학에서 공부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났다. 전교생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예의가 바른 학생으로 칭찬이 자자했다. 이렇게 존경과 칭찬을 받으며 우스터대학 철학과 4년의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이어 선생은 1930년 6월에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그리하여 1931년 6월 석사학위를 취득한 선생은 그 해 9월 귀국하여 다시 함흥 영생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영생여학교로 되돌아 간 데에는 선생 나름대로의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다. 선생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말 연구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그것은 한국인의 체취가 배인 방언(方言)의 조사 연구로부터 출발하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선생은 방언의 조사 연구에 적합한 영생여고보의 복귀를 선택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키움에 있어 여성, 특히 어머니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을 더욱 절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선생은 방언을 수집하고 우리 말과 역사에 대한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1931년 9월 만주침략 이후 더욱 악랄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수업 중 틈틈이 학생들에게 세계정세와 일본의 불안한 장래, 우리 민족의 우수성 등을 설명해 주곤 하였다. 예컨대 선생은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 역사를 열거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남장을 하고 왜군을 물리친 김홍도(金紅桃), 왜장을 껴안고 대동강에 뛰어든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 등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여학생들의 민족적 각성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갔다. 그리고 선생은, “옛날 신라 때의 마의태자(麻衣太子)는 그 아버지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한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일생을 조국 부흥에 바쳤으니, 너희들도 비록 우리나라가 현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유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마의태자처럼 조국을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 주기 바란다”라고 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한편, 후에 어머니로서 그 자제를 독립운동의 동량(棟梁)으로 키우도록 교육하였다.
조선어학회 활동
그러나 일제는 중일전쟁을 앞둔 1937년 3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하더니 1938년 3월에는 ?조선교육령?을 개정 반포하여 이듬해부터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고, 교수 용어로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부득이 수신(修身)이니 대수(代數)니 하는 전공 이외의 과목을 맡아 가르치게 되어 심한 민족적 모멸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있던 정인승이 같이 일할 것을 권유하자, 민족교육을 통한 독립의지 실현의 길이 막혀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던 선생은 찬란한 민족문화의 정수인 우리 말, 우리 글의 연구 보급을 통해 위축된 한국인의 민족혼을 다시 일깨우기로 결심하고 영생여고보를 사직한 후 조선어학회로 전직하여 1941년 5월부터 사전 편찬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이 시기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 사업인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정열적으로 벌이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은 한말 국망의 위기 상황에서 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국권회복을 달성하려는 목적 아래 주시경(周時經) 선생을 중심으로 1908년 8월 조직되어 활동하였던 최초의 민간 국어 연구단체인 국어연구학회의 사업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1910년대 초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착수했다가 1914년 주시경 선생의 사망과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것이었다.
그 후 1919년 3?1운동으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1921년 12월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인 장지영(張志暎) ? 권덕규(權德奎) ? 이병기(李秉岐) ? 김윤경(金允經) 등에 의하여 조선어연구회가 조직됨에 따라 이들에 의해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이 재차 추진되었다.
특히 당시 조선어연구회 인사들과 각계 유지들은 “조선 고유문화의 쇠퇴와 민족정신의 불통일은 무엇보다도 조선어문(朝鮮語文)의 난립과 불통일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하고, “조선 민족이 갱생할 첩로는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무로 해야 하며,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꾀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각계의 저명 인사 108명은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朝鮮語辭典編纂委員會)를 조직하여 사전 편찬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갔고, 이 과정에서 사전 편찬의 학술적 책임을 맡았던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따라서 이후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 민족문화 부흥운동의 핵심 사안으로 사전 편찬 사업이 진행되었다.
우선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어휘의 수집과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한글 연구성과의 보급과 한글 교습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파견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수시로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2년 5월부터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한글?을 창간 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문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이와 같은 우리말 우리 글의 연구 보급은 한민족의 일체감 및 정체성 확립과 민족문화 부흥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역량을 키워 민족독립을 달성코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제 조선어학회는 학술 연구단체의 차원을 뛰어 넘어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와 민족독립의 토대 마련이라는 어문 민족운동 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화되고 있었다.
어문 민족운동의 첫 결실로서 조선어학회는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였고, 이후 1936년 10월에는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사용하는 말을 기준으로 한 표준말 사정 작업을 거쳐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하였다. 또 1940년 6월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하였다. 이같은 선행 준비 작업과 함께 조선어학회는 정인승 ? 이윤재(李允宰) ? 이중화(李重華) ? 한징(韓澄) 등을 조선어 사전 편찬 전임위원으로 위촉하여 민족적 대사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인 1941년 5월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에 전임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선생은 뒤늦은 동참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사전 편찬 업무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사전 원고를 하나하나 써나가면서 어휘를 뽑아 주석을 달고 이를 카드로 정리하는 한편, 회원들이 써 보낸 원고를 마무리하다가 밤을 새우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
이처럼 불철주야로 사전 편찬 사업에 종사하던 선생은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홍원(洪原)경찰서의 증인 소환장을 받고 출두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일제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즉 일제는 침략전쟁에 우리 민족을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아울러 식민지 동화정책의 최후단계인 민족말살정책의 완성을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좋은 식민지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이 가운데에서도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용 금지 및 말살, 그리고 일본어 상용’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어떠한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 빌미가 되었던 것이 영생여고보 4학년 학생인 박영옥(朴英玉)의 일기 내용 중의 일부였다.
일제 경찰은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우리말로 대화하다가 발각되어 조사받게 된 박영옥이 2학년 때 쓴 일기 중에서 “국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문구를 찾아내 이를 트집잡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국어란 일본어로, 일본어를 사용한 자를 벌주었다는 것은 반일적인 처사로 그 배후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박영옥 등 영생여고보 학생들을 고문 취조하였다. 그 결과 일제 경찰은 영생여고보 학생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사가 선생임을 알아내고, 선생을 홍원경찰서로 소환하여 온갖 악형과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이며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일제 경찰은 1942년 10월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즉 홍원경찰서에서는 10월 1일 이극로(李克魯) ? 정인승 ? 이윤재 ? 한징 ? 이중화 ? 김윤경 ? 최현배(崔鉉培) ? 이희승(李熙昇) ? 장지영 ? 권승욱(權承昱) ? 이석린(李錫麟) 등 11명을 체포하고, 이어 이우식 ? 이강래 ? 이병기 ? 김법린 ? 이인 ? 안재홍 등 모두 33명을 체포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사전 편찬 후원 회원들 전원을 검거하였다. 그리고 사전 편찬 원고와 수십만 장의 자료 카드를 압수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후 일제는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1년여의 조사를 통해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 통일 ?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점진형태(漸進形態)다”라고 하여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하였다. 이같은 내란죄를 적용하기 위해 일제 경찰은 조선어학회 관련 인사들에게 소위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불리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하였고, 그로 인해 1943년 12월 8일에는 이윤재 선생, 다음해 2월 22일에는 한징 선생이 옥사하는 비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선생 또한 홍원경찰서에서 1년여 동안의 갖은 고문과 악형을 당한 뒤, 1945년 1월 1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 재건과 우리말 큰사전 편찬
1945년 8월 해방 이후 선생은 동지들과 더불어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여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세대 ? 중앙대 ? 홍익대 ? 동국대 ? 국학대 및 1948년 9월 조선어학회에서 6개월 과정으로 설립한 세종 중등 국어 교사 양성소 등에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특히 선생은 미국 유학으로 영어가 능통하여 미 군정의 여러 고위 직책을 제의받았으나 모두 고사하고, 오직 우리 말과 글의 정리와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렇듯 선생이 모든 세속적인 출세를 거절한 채, 우리말 연구와 ?큰사전? 편찬, 그리고 후진 양성에 주력한 것은 자신이 빌미가 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점을 못내 가슴 아파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6년 6월 ?한자 안 쓰기 문제?(아문각), 같은 해 10월에는 김원표(金源表)와 함께 ?중등 국어 독본?(한글사), 12월에는 시가집인 ?아름다운 강산?(신흥국어연구회), 이듬해 4월에는 ?고어독본(古語讀本)?(연학사)을 펴내는 등 정력적인 저술활동을 벌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재건된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편찬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발행된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제1권, 이듬해 5월 5일 발행된 ?큰사전? 제2권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선생은 영생여고보 재직 시절부터 틈틈이 모아 온 자료를 토대로 1948년 12월 김병제(金炳濟)와 함께 ?조선고어방언사전(朝鮮古語方言辭典)?(일성당서점)을 펴냈다.
이후 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를 한글학회로 개편할 때, 선생은 이 학회의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 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선생은 고향인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951년 1?4후퇴 때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선생은 우리말 ?큰사전? 편찬사업을 멈출 수 없다는 일념으로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1952년 5월 25일 유제한 선생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서울신문사에서 원고를 마무리하여 우리말 ?큰사전? 넷째 권의 지형을 떠놓고, 고향인 파주로 식량을 구하러 가다가 타고있던 군용트럭이 전복돼 1952년 11월 2일 50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7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선정한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이 달의 문화인물’에 선정 되었다.
2000년 파주시에서는 선생의 생가터에 정태진기념관을 건립하고 2001년 12월 21일 광탄면 영장리로 이장한 선생의 묘소를 파주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하였다.
석인 정태진 선생 해적이
?1903. 7. 25 파주시 금능동 406번지에서 출생
?1917. 4 서울고등보통학교 입학
?1918. 3 안동 권정옥님과 결혼
?1921. 3 서울고등보통학교 졸업
?1923. 12 맏아들 해동 탄생
?1925. 4 함경남도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교사 부임
?1927. 5 미국 유학길에 오름
?1930. 6 미국 우스터대학 철학과 졸업
?1931. 6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 교육학과 과정 수료
?1931. 9 미국에서 귀국,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재부임
?1934. 5 맏딸 해영 탄생
?1938. 12 둘째딸 해경 탄생
?1941. 6 조선어학회에서 <우리말큰사전> 편찬 시작
?1942. 9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흥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름
?1945. 8 연세대ㆍ중앙대ㆍ홍익대ㆍ동국대ㆍ국학대 등에서 국어학 강의
?1946. 6 <한자안쓰기 문제> <중등국어독본> <아름다운 강산>펴냄
?1947. 4 <고어독본> 펴냄
?1948. 12 <큰사전>편찬 계속, <조선고어방언사전>펴냄
?1949. 9 한글학회 이사 취임
?1951. 1 6. 25로 고향에 피신하다가 1. 4후퇴때 부산으로 피난
?1952. 11. 2 <큰사전>속간에 전념하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
?1952. 11. 30 한글학회 주최로 ‘고 석인 정태진 선생 추도식’ 거행
?1954. 11. 7 한글학회 외 3개 단체 ‘고 석인 정태진 선생 추모회’ 구성
?1962. 3. 1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추서
?1983. 9. 3 ‘고 석인 정태진 선생 나신 80돌 추모식’거행
?1997. 11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1998. 10 문화관광부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
?1998. 10. 31 한글학회 주최 ‘석인 정태진 선생 기념 발표회’개최
?2000. 생가터에 정태진기념관 건립(파주시 중앙도서관 옆)
?2001. 12. 21 정태진 묘 파주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
정태진 선생의 글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아름다운 꽃 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새봄을 자랑하리.
- 정태진 -
시인詩人의 가슴
시인의 가슴에는 무엇이 있나
청산에 나는 새와 꽃 위의 나비
수정같은 생각과 옥같은 말이
시인의 가슴에는 무엇이 있나
자유를 사랑하는 천사의 노래
평화를 사모하는 선녀의 춤이
시인의 가슴에는 무엇이 있나
진리를 찾아가는 길손의 마음
정의를 부르짖는 청춘의 혼이
-정태진 “생명生命”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