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과 연원
여산(礪山)은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이 합쳐진 지명이다. 1396년(태조 5)에 여량현이 낭산현을 병합하였고, 1399년(정종 2)에는 여산현이라 개칭하였다. 1896년 전라북도 여산군이 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여산군이 폐지되고 관할 11개 면이 여산면 등 5개 면으로 통합되어 익산시에 편입되었다.
우리나라 송씨의 본관은 여산(礪山), 은진(恩津), 진천(鎭川), 연안(延安), 홍주(洪州), 신평(新平), 서선(瑞山), 야성(冶城), 청주(淸州) 등 여러 송씨가 있고, 고문헌에 나타난 송씨의 관향은 무려 172본이나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면서 관적을 상실했거나 특수한 사정에 의해 현주지를 관향으로 하거나 그중에 걸출한 인물을 관향조로 삼는 경우도 있다.
여산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조에서 진사였으나 관직에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에 은거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이 아들 송숙문(宋淑文)이 정당문학에 오름으로써 추은이 내려서 추밀원 부사에 증직되었다. 송유익의 선계는 중국 경조(京兆) 출신으로 당나라 호부 상서를 역임한 송주은(宋柱殷)의 후손 송자영(宋自英)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고려 원종 때 4대손인 송송례(宋松禮)가 왕실을 위협하던 권신 임연(林衍) 일파를 제거하는 공을 세워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고 식입 1천호를 받았다. 이로써 여산송씨 가문의 기틀을 다졌으며, 후손들은 송송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세거지를 보면 시조 송유익은 전북 익산시 여산에 은거하고 묘소가 그곳에 있고, 3세 송희식 이래로 수도인 개성, 장단, 양주 등 경기지역에 묘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개성 부근에서 세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산송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72,763가구 232,753명이 거주하는 거족으로 중흥하였다.
분적종 및 분파
송유익(宋惟翊)은 여산송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의 아우 송천익(宋天翊)은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시조, 삼남 송문익(宋文翊)은 서산송씨(瑞山宋氏)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 중찬(中贊)을 지낸 송례(松禮)의 아들 염(琰)·분(?)의 형제대에서 원윤공파(元尹公派)·밀직공파(密直公派)·소윤공파(少尹公派)·지신공파(知申公派)·정가공파(正嘉公派)의 5파로 갈라졌는데, 앞의 3파는 염의 아들이고 나머지 2파는 분의 아들이다. 여산송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2명(영의정 1명, 좌의정 1명)과 왕비 1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다.
원윤공파 송운의 장남 송선(宋璿)은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의 외조로 삼중대광 여랑군에 피봉되었고, 그 후손들은 대구에 세거했다. 송선의 8대손 송익필(宋翼弼)의 선조들은 황해도 백천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송익필은 교하에 거주하던 선조 때의 대학자로서 당대 ‘8문장(文章)’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서출(庶出)이라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도의지교를 맺고 평생 친교를 나누다가 동인에 의해 신분이 천민으로 떨어지고 정여립의 난과 관련하여 구속되고 풀려났다가 다시 정철이 왕세자 책봉 문제에 연루하여 유배를 가게되자 송익필 또한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다음해 유배에서 풀려나 만년을 충남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마양촌의 첨주 김진려의 집에서 우거하다 66세로 면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제자들이 당진군 현북면 원당동에 장사지냈다. 후손들은 점차 흩어져 당진 송악면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송운의 6세손 충강(忠剛) 송간(宋侃)은 단종 폐위 때 영월에 복명하고 계룡산에서 단종의 삼년상을 마친 후, 흥양(전남 고흥)으로 낙향해 살았으며 그후 후손들은 전국에 산거하고 있다. 송간의 아우 송시(宋?)와 송희(宋僖)는 형과 함께 흥양에 가서 은거하여 그 자손들은 강진에 세거하고 있다.
송간의 재종 송경원(宋慶元)은 단종 폐위 때 전북 임실에 잠적하여 그 후손들은 그곳에 자리잡았다.
송운의 증손 충정공 송거신(宋居信)은 태종 이방원이 임금 되기 전에 사냥을 나가 맹호를 만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가로막아 김덕생이 활을 쏘아 범을 죽이니 호환으로부터 태종을 구한 공으로 태종 즉위 직후 우군도총제부사 여산부원군의 교지를 받았다. 그 자손들이 파주, 고양, 서산, 장흥 등지에 터를 굳혔다.
송운의 손자 송빈(宋贇)은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전북 부안에 예장하였으니 그 자손들이 부안 제주 등지에 뿌리를 내렸다.
송운의 5세손 송문(宋文)은 덕산군(德山君)에 봉해졌으며, 그후 영남에 터를 잡아 후손들은 영주, 봉화, 횡성에 산거하였다.
송운의 손자 송극명(宋克明)은 단종 폐위시 동래로 물러나 그 후손들은 동래,부산,김해 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여산송씨의 조선조 문형(대제학)은 모두 6명으로 송송례(宋松禮), 송염(宋琰), 송분(宋?), 송서(宋瑞), 송순(宋珣), 송거신(宋居臣)이며, 중종 때 청백리에 오른 이는 이조판서를 지낸 송천희(宋千喜)가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국회의원을 지낸 송경섭, 송방용, 송필만, 송영주, 송능운, 송문섭, 송호림, 송을상, 송관수, 송지영, 송협섭, 송영길, 송훈석이 있고, 체신부 장관과 광주광역시장을 지낸 송언종, 법무부장관 송정호, 도지사를 지낸 송문헌, 조계종 총무원장 송현섭(월주) 등이 있다.
여산송씨족보(礪山宋氏族譜)
1653년(효종 4)에 제작된 2권 2책의 목판본 여산송씨 세보(世譜)는 현재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심석리의 여산송씨 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1991년 4월 2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초간본(初刊本)은 1606년 경에 나왔으며, 첫 장에는 1606년(선조 39)에 송언신(宋言愼)이 쓴 구서(舊序)가 있고, 이어 1651년(효종 2)에 여이징(呂爾徵)이, 2년 후인 1653년에 송시길(宋時吉)이 쓴 서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책의 마지막에는 1610년(광해군 2)에 송일(宋馹)이 쓴 발문(跋文)이 있다.
시조인 송유익 이하 19세손까지 기록되어 있고, 각 인물에 대해서는 등과(登科)·관작(官爵)·향년(享年)과 분묘의 위치 등을 적었다. 이성(異姓)에 대한 기재는 4대에 한하였고, 파 이름은 지면의 서두에 기재하였다. 자녀는 남녀 구별 없이 연령순으로 기재하였다. 사위[女壻]의 전실(前室) 소생인지 후실(後室) 소생인지를 밝혔으며, 서자(庶子)·서녀(庶女)도 표시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단자를 늦게 보내 온 자손들은 족보 끝에 추서(追書)하였다. 14세손까지는 양자 입양 사실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14세손 이후에는 양자 입양이 기록되고 있다.
이 족보에는 자녀가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는 조선 전기 족보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장자에게 상속시키는 제도가 완전하게 정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족보 가운데 17세기 이전의 족보가 희귀하므로 이 족보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여산송씨의 파주입향
조리읍 장곡리 놀뫼마을의 여산 송씨는 18호가 모여살고 있는데 예전에는 37세대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원윤공파 송운(宋?)의 증손자 충정공 송거신(宋居信)을 시조로 하는 충정공파(忠靖公派)이다. 조선 영조 때 송익저(宋翼?)가 처음 입향을 하여 270 여 년간 장곡리에서 후손들이 뿌리를 내려 살고 있다. 충정공 송거신의 묘와 입향조 익저의 묘는 광탄면 신산리에 있다. 적성면 마지1리에도 원윤공파(元尹公派) 후손들이 정착해 세거하였다. 여산 송씨는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파주시에 278가구 9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송거신 (宋居信,1369년(공민왕18)~1447년(세종 29)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전법판서(典法判書) 첨(詹)의 아들이다. 원윤공파 시조 송운의 증손자이다.
태종 비 원경왕후와 인척이 되는 인연으로 태종의 잠저(潛邸) 때부터 후대를 받았다. 별장(別將)을 거쳐 호군으로 있을 때 이방원, 후의 태종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섣불리 건드린 표범이 이방원에게 달려드는 것을 결사적으로 때려잡아 그를 구해주었다.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다. 군기소감을 거쳐 1402년(태종 2) 내자소경, 사복시부정이 되었다. 이듬해 호룡순위사대호군이 되고, 1404년(태종 4) 상호군이 되었다. 1406년 우군동지총제와 우군도총제를 역임하였다. 1426년(세종 8) 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43년(세종 25) 왕으로부터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묘는 광탄면 신산리에 있다.
송익필(宋翼弼,1534년(중종 29)~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이다. 판관 사련(祀連)의 아들이다. 파주 교하 산남리에 거주하였다.
할머니가 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하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 번 본 외에는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이 세력을 얻으며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선조 26)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 없이 친구나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충남 당진군 당진읍 원당리 마양촌에서 죽어 그곳에 묻혔다.
1586년(선조 19)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구봉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정홍명(鄭弘溟)·강찬(姜燦)·김반(金槃)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최립(崔?), 이순신(李純臣), 윤탁연(尹卓然), 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장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遷)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귀족이라도 한 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龜峯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송진명(宋眞明,1688년(숙종 14)~1738년(영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유(汝儒), 호는 소정(疎亭)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징은(徵殷)의 아들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성균관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거쳤다. 그 후 평안도·황해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호조판서,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한림(翰林), 삼사(三司), 전조(銓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파주읍 파주4리에 묘가 있다.
권효숙 (첨파역사문화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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