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 1번 ‘의주로’에 위치한 윤관 묘
연초록 새잎이 점점 신록으로 푸르러지는 6월이다. 조선시대 옛길 의주로를 지나다 보면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고려의 명장 윤관의 묘가, 6월의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 아래 웅장한 자태로 앉아 있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면 홍살문과 일직선으로 왕릉처럼 반듯한 사초가 있고, 그 위쪽으로 높이 둘러 친 담장 앞에 묘가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왼쪽에는 묘비가 있다. 한 계단 아래 양쪽에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는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고, 양편으로는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 등이 일렬로 배치되었다. 묘역으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는 윤관이 출정 할 때 임금이 하사한 교자를 부장한 교자총비(橋子塚碑)와 전장에서 탔던 말의 전마총(戰馬塚)비가 있다. 한 계단 올라가면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 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윤관의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고,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윤신달의 고손이다. 고려 문종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인 1104년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자주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1107년 부원수 오연총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하였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태몽을 꾸고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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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정벌
윤관의 생애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에 나섰던 1104년 2월부터 1111년에 죽을 때까지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부터인데 그때는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었다. 하지만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의 세력이 점점 성장하여 1103년 우야소(烏雅束)는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였다. 다음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 밖까지 쳐들어오자 고려는 무력으로 여진을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임간을 보내 여진을 물리치려 했지만 여진군에게 대패하였다. 숙종은 다시 윤관에게 명하여 여진족 북벌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 1104년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윤관은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이 되어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 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한 윤관은 전투력 증강과 기병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104년 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하였다. 그 때의 별무반을 고려사에서 찾아보면 ‘적에게 패한 까닭이 그들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다.’라는 상소에 따라 이 부대가 설립 되었다. 말을 가진 자는 신기군(기병부대)으로 삼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보병부대), 도탕군(돌격부대), 경궁군(활 쏘는 부대), 정노군은 (쇠뇌부대 : 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공격용 무기를 사용하는 부대), 발화군(화공부대)으로 조직하고 승려들을 뽑아서 항마군으로 삼았다.’
별무반은 그 당시로서는 지금의 군대 조직과 흡사한 병과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으니, 윤관의 지략이 얼마나 뛰어 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완벽하게 여진 정벌을 준비 한 윤관은 1107년 여진족이 다시 쳐들어 올 기미가 보이자 부원수인 오연총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 격파하였고,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물리침으로써 여진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두 번째 여진 정벌에 나선 1108년, 북방의 여진족 100여 촌락을 평정한 윤관은 곧 국경선을 확정하는 작업에 착수해, 동으로 화곶령, 북으로 궁한이령, 서로는 몽라골령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9성의 설치와 반환
국경선이 확정되자 윤관은 영주, 복주, 웅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 평융에 성을 쌓았다. 9성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것이 윤관의 동북 9성이다. 성을 쌓은 윤관은 남쪽으로부터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을 요충지로 만들었다.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장악하자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살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1108년 초에 군사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 왔다. 윤관이 9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으니 성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화친교섭을 해 오자,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을 되돌려 줄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대부분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근거를 잃은 여진족이 계속 변방을 침략해 왔고, 9성이 거리가 너무 멀고 넓어 관리하기에 경비가 많이 들고 힘에 부친다는 점이다. 또한 무리한 정벌로 국력을 소모했다며 윤관을 비판하고, 그동안 치른 전쟁과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점을 들었다. 다음해 7월 조정에서는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정하여 7월 18일부터 9성의 철수가 시작되었고, 윤관이 장병들과 목숨 걸고 차지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을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9성을 되돌려 주게 되자 여진정벌에 실패 한 것 아니냐는 조정 대신들이 윤관을 패장이라고 모함하였다. 윤관은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까지 삭탈 당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고 처벌하자는 주장도 있어 북방에서 돌아와 왕에게 보고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칩거 하였다. 고려 최고의 명장, 전쟁영웅의 어이없는 불명예 퇴장이었다. 처벌을 하라는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하던 예종이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를 내렸으나, 윤관은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고 1111년 5월 억울한 가슴에 한을 품고 눈을 감았다.
지금 학계에서는 윤관의 9성 위치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두만강북설, 길주이남설, 함흥평야설(일본학자) 등이 있다. 한·중 국경문제를 논의할 때 중요한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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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와 청송심씨 산송 분쟁
윤관 묘 뒤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있다. 담장 뒤쪽으로 돌아가면 2008년까지 조선조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쌍분 묘 등, 19기의 묘가 있던 자리였는데, 지금은 이장하고 빈자리만 남아 있다. 1111년 이곳에 안장 되었던 윤관장군의 묘는 오랜 세월이 흐르며 비석은 어디에 갔는지 없어지고 가꾸지 않은 작은 봉분만 남아 방치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간에는 작은 봉분이 윤관장군의 묘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었으나 누구의 묘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그 후 500여 년이 지난 1658년 심지원이 효종으로부터 그 일대의 땅을 하사 받아 청송심씨 문중 묘역으로 조성하고 심지원도 1662년 사망 후 이곳에 묻혔는데 그 위치가 윤관 묘라고 불리던 오래 된 산소 3m 위쪽이었다. 심지원은 1593년 선조 때 태어나 1662년 까지 살았고, 여러 요직을 거쳐 효종 때 영의정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심익현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사돈이 된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는 <만사고(晩沙稿)>가 있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난 후 윤씨 문중에서 묘를 찾는 과정에서 청송심씨 묘역 앞까지 파고들어 가자 윤씨 문중 사람을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심지원의 손자 심정최가 영조 36년인 1763년 고양군수에게 윤씨 문중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인척관계에 있다하여 사건을 기피했고, 경기감사가 파주 군수에게 해결하라고 지시했으나 역시 윤씨 문중과 외척이 된다하여 기피했다. 당시 윤씨 문중이나 심씨 문중 두 집안은 중앙 집권의 실세였기 때문에 지방 관아 수령이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은 중앙으로 이첩되어 두 문중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영조의 판결을 청하였다. 영조는 두 명문 집안의 문제를 신중히 다룰 것을 생각하고 한성부에 명하여 자세히 조사해 오라고 하여 두 집안을 화해시키고, “이후 윤씨 집안과 심씨 집안은 분란을 그치고 각기 선조의 묘를 잘 지키라”고 명하였다. 두 집안은 화해하고 묘소 가운데 곡장을 둘러 경계를 짓고 화해 증서를 써서 각기 보관하였다.
여기에 대해 영조실록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영조실록 권103 40년 6월 14일(갑오) 고려(高麗) 시중(侍中) 윤관(尹瓘)과 고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에 사제(賜祭)를 명하였다. 처음 윤관과 심지원의 묘가 파주에 있었는데, 윤씨가 먼저 입장(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심씨가 그 외손으로서 그 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 집 자손들이 산 아래에서 비석 조각을 습득하여 심씨 집 자손과 쟁송(爭訟)하여 끝이 나지 않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만류(挽留)하여 다툼을 금하게 하고, 각기 그 묘를 수호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관은 전조(前朝)의 명상(名相)이고 심지원은 아조(我朝)의 명상이라 하여 똑같이 치제(致祭)한 것이다.} 그간 윤관과 심지원 후손 간에 산송(山訟) 쟁의가 수 백 년을 내려오다가 이제야 서로 합의가 되어 심지원의 묘를 이장 하였다.]
그러나 이후 청송심씨 집안에 높은 곡장으로 시야가 가려지고 묘에 그늘이 진다고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면서 분쟁은 다시 시작 되었다. 그렇게 400여 년 동안 해결 되지 못했던 분쟁이 두 문중의 지혜로운 결정으로 2005년 8월 합의하여 청송심씨 묘역은 바로 옆 능선으로 2008년 4월부터 6월까지 19기의 묘를 모두 옮겨 조성하였다.
파주의 윤관 관련 다른 유적들
파주에는 윤관의 다른 유적들 또 있다. 파평면에 있는 ‘용연못’은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 관련 전설이 있는 곳으로, 신라 진성왕 7년(893년) 음력 8월 15일 운무가 자욱한 용연에 옥함이 떠있는 것을 보고 근처에 사는 윤온 할머니가 거두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는 오색찬란한 깃털에 쌓여 있었으며 양어깨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점이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비늘이 있으며 발바닥에는 북두칠성 형상인 7개의 흑점이 있었다. 용연은 자생적 연못으로 1920년에 세운 ‘파평 윤씨 용연’이라고 새긴 비와 1972년에 세운 ‘파평윤씨발상지’ 비가 세워져있다. 이 연못에는 여름철 희귀식물인 노란 “남개연”이 자생하고 있어 연꽃을 보러 찾아 가는 이들도 많이 있다.
파평산 정상에는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이 말을 훈련하던 치마대가 있고, 법원읍 웅담리의 상서대(尙書臺)는 윤관이 상서로 있을 때 여가를 틈타 시문과 휴양을 하던 곳으로, 우측에 ‘파평윤공상서대(坡平尹公尙書臺)’라고 쓴 비가 세워져 있고, 상서대비 뒤편으로 묘소가 실전된 후손들의 ‘추원단’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상서대 옆 하천 절벽에 ‘낙화암(落花岩)’이라 쓴 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엔 애달픈 전설이 있다.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정벌하러 전장으로 떠나며 애첩에게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붉은 기를 들고, 지면 흰 기를 들겠다.”고 약속을 했다. 여진족을 물리치고 기분 좋게 돌아오던 장군은 갑자기 장난이 치고 싶어, 붉은 기를 들어야 할 손에 흰 기를 들었다. 애태우며 소식을 기다리던 여인은 멀리서 달려오는 군사들 위로 흰 기가 보이자 장군이 죽은 줄 알고 깊은 연못 위 바위에 올라가 몸을 던졌다. 윤관은 여인을 죽게 한 것을 후회하며 ‘낙화암’ 비석을 세워 그의 사랑을 기렸다. 그 여인의 이름은 웅단(熊丹)으로 웅단이 빠져 죽은 연못을 웅담(熊潭)이라 하는데, 지금까지도 그 마을 이름을 ‘웅담리’로 부른다.
윤관 묘 바로 앞 도로는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구파발과 벽제관을 거쳐 신의주로 가는 의주로이다.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중국을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갔고, 선조 임금도 이 길을 거쳐 의주로 피난길을 떠났던 중요한 길이었다. 묘역 아래 수도 가 큰 나무 밑에는, 나무로 짠 평상과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어 새 소리 들으며 쉴 수도 있고, 도시락을 펼쳐 놓고 먹을 수도 있다. 묘로 올라가는 길에 소나무 위에서 지저귀던 ‘후투티’의 맑은 새 소리가, 내려오면서 보니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삐익~ 삐익~ 삑 삑” 하며 노래하고 있다. 고요한 숲속의 정적이 일순 파장을 일으키며 맑은 기운을 불러들인다. PAJU 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