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내리는 비로 사위가 회색빛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일요일 아침이다. 전신주에 ‘하늘빛길’ 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는 언덕을 지나 성당으로 간다. 언덕너머로 펼쳐지는 하늘이 낮게 내려 앉아 있고, 길가 떡갈나무는 습기를 머금어 푸른 이끼를 두르고 있다. 능소화가 필 때면 장마가 시작된다더니 지나는 길목 어느 집 담장위에 핀 꽃이 붉은 색으로 곱다. 오래 피어 있지 못하고 비에 젖어 떨어진 꽃송이들이 담장 아래서 핏빛으로 처연하다. 모퉁이를 돌아 더 가면 초등학교로 가는 내리막길 ‘샛별 길’이다. 학교울타리로 쳐 놓은 긴 펜스를 따라 가다보니 자투리땅에 움직이는 노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궁금해서 가까이 가보니 노란 비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무엇인가 심고 있었다. 옆에 놓인 쟁반에는 채송화며 금잔화, 백일홍, 봉숭아 등, 종류도 다양한 꽃모종이 가득하게 얹혀 있다. 지난해까지 만해도 학생들의 통학로인 이곳에 들깨가 심어져 있었는데, 꽃 심는 노인을 보니 반갑고 고마운 생각이 든다.
꽃 심는 노인을 보며 비오는 날 꽃모종을 심던 친정어머니 모습이 그려진다. 그때 어머니는 꽃을 참 좋아 하셨다. 어머니는 비 맞으며 쫓아다닌다고 핀잔을 하면서도 채송화는 키가 작으니 앞쪽에 심고, 그다음엔 금잔화, 봉숭아, 사루비아, 백일홍, 특히 키다리 꽃은 울타리 쪽에 심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늦가을에는 알뿌리 꽃인 칸나, 다알리아, 함박꽃 등을 캐서 부엌 흙바닥 귀퉁이에 묻어두었다가 봄이면 꽃밭에 옮겨 심었다. 어머니가 정성으로 가꾼 꽃밭은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았고, 사진을 찍는 이도 있어 어린 마음에 우쭐 했다. 바쁘게 농사일을 하면서도 꽃밭을 가꾸던 어머니의 성정이 지금까지 내 가슴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할머니 손으로 심은 어린 모종들이 갖가지 꽃을 피우면 ‘샛별길’을 ‘꽃길’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친구와 다투었던 아이들이 우정이라는 꽃말의 채송화 앞에서 다정히 손잡기를, 아이에게 봉숭아물을 들여 주기 위해 허리 숙여 꽃잎 따는 엄마의 손길이 머물기를, 그리고 힘든 일에 지친 이에게는 오랫동안 꽃잎을 간직하는 금잔화가 힘이 되기를 바람 해 본다. 짧은 봄날 앞 다투어 피는 꽃들이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희망을 주지 않던가. 그러나 무엇보다 할머니가 늘 건강해서 내년에도 그리고 또 후년에도 꽃모종 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유기농 열풍으로 텃밭 가꾸기가 유행인 요즘, 사람들은 공터만 있으면 농작물을 심는다. 달개비 꽃 가득했던 축대위에는 고구마를 심고, 나팔꽃 피던 비탈길에는 부추나 호박이 심어져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할머니가 꽃 심는 걸 보며 마음이 따듯해졌다. 어느 덧 성당에 다다르니 저 만치 수녀님이 보인다. 큰소리로 인사를 하니 수녀님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묻는다. 할머니의 꽃 심는 마음이 내 얼굴에 벌써 환한 꽃이 되어 피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