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2월 24일 파주가 낳은 국어교육학자 이응백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당시 87세)가 약 3,300여권의 소장 도서를 파주시립 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 도서들은 이응백 교수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저서와 귀중한 소장 자료를 교육환경 조성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고향인 파주에 기증한 것이다.
이에 보답하고자 3월 11일 오후 4시 파주시장 접견실에서는 파주시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응백 교수 가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파주시장은 “귀중한 자료 기증으로 도서기증 확산운동의 시발점이자 도서관 발전의 초석이 될 것” 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향인 파주를 남다르게 사랑했던 이응백 교수.
평생을 소장하던 자료를 고향에 기증한 이응백 교수는 안타깝게도 가족들이 감사패를 받은 날로부터 18일 후인 2010년 3월 29일 오전 4시 4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지난 2010년 2월 24일 파주가 낳은 국어교육학자 이응백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당시 87세)가 약 3,300여권의 소장 도서를 파주시립 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기증 도서들은 이응백 교수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저서와 귀중한 소장 자료를 교육환경 조성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고향인 파주에 기증한 것이다.
이에 보답하고자 3월 11일 오후 4시 파주시장 접견실에서는 파주시장과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응백 교수 가족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파주시장은 “귀중한 자료 기증으로 도서기증 확산운동의 시발점이자 도서관 발전의 초석이 될 것” 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향인 파주를 남다르게 사랑했던 이응백 교수.
평생을 소장하던 자료를 고향에 기증한 이응백 교수는 안타깝게도 가족들이 감사패를 받은 날로부터 18일 후인 2010년 3월 29일 오전 4시 40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파주 파평면 덕천리 샘내마을 출생
이응백 교수는 1923년 파주시 파평면 덕천리 330번지 속칭 샘내마을에서 출생했다.
「坡州鄕友會報」(1989. 5. 28)에 기고한 <故鄕길>이라는 글에서 그는 고향마을 샘내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파평산을 안산(案山)으로 동서로 길게 놓인 동산 기슭에 30호 남짓 초가집이 이엄이엄 늘어선 고향마을 샘내를 꿈속에 본다. 윗마을과 가운데마을, 아랫마을로 구분되고 가운데 마을앞 두둑한 뚝에는 몇 아름들이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으며 마을앞을 흘러내리는 개울 축동에는 오리나무, 버드나무, 밤나무, 은행나무가 섞여 늘어섰고 아랫마을 앞 축동에는 수 백년 묵은 소나무 5, 6그루가 정정하게 서 있어 마을의 수호신격(守護神格)인 서낭당을 이루고 있다.’
‘6.25 동란으로 집들과 함께 그것들은 대부분 타 버리고 마을자체도 개울을 건너 파평산이 더 가까운 들판으로 옮겨져 다른마을, 아니 타처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이응백 교수가 기억하는 고향마을 샘내는 현재 파주시 파평면 덕천리다.
이 곳 샘내 마을에서 이응백 교수는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書堂) 공부를 하다가 열 살이 되던 해 파평면 두포리에 있는 파평공립보통학교(현 파평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서당을 다니다가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권유로 파평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지만 이미 국문과 구구단, 가감승제, 사칙(四則)까지도 깨치고 일본어까지 배운 이 교수는 1학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담임이었던 성낙영(成樂榮) 선생은 조선어 시간에 이응백 선생이 혼자 앞질러 읽어 나가는것을 보고 “네가 나와서 가르치라”고 해 그렇게 한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파평공립보통학교의 인연은 겨우 한 학기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수업료가 한 달에 40전인데 그것을 제때 못내 독촉이 심한데다가 바로 아랫동네 애들의 텃세가 심해 학교에 다닐 흥미를 잃게된 것이다. 한 학기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잠시 다시 서당엘 다니다가 동기들이 3학년에 올라갈 때 적성공립소학교(6년제) 2학년에 편입을 했다. 적성공립소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에 입학을 했고, 그 덕으로 8·15 광복 후 대학과정에까지 연결이 되어 1949년 7월 15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중등학교 교단에 잠시 머물고 1954년 4월에 이화여대(梨花女大) 전임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4월 모교(母校)인 서울대 사범대학으로 옮겨 31년간 교수로 재직한 후 1988년 8월 31일 정년으로 퇴임하여 서울대 명예교수(名譽敎授)로 남은 일생을 보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어교육학자의 길
이응백 교수는 본관(本貫)이 전주(全州)로 정종대왕(定宗大王) 제4남 선성군(宣城君)의 16대손이다. 그런 이유로 전주이씨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이사 및 선성군파종친회(宣城君派宗親會)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응백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국어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1955년 2월 25일에 한국국어교육연구회를 설립하여 1994년까지 회장을 역임하는 등 무려 40여년을 국어교육연구에 관여해 왔으며 말년에는 사단법인(社團法人) 한국어문회(韓國語文會)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이응백 교수는 문학인(文學人)이었다.
이응백 교수의 문학과의 만남은 그냥 자연스런 삶의 부분이 아니었다.
어려서 서당(書堂)에서 한문 수학을 했는데 경성사범학교(京城師範學校) 보통과 3학년 여름방학에 몽양(夢陽)의 종조부인 여철(呂喆) 선생 앞에서 맹자(孟子) 통독을 한 인연으로 대학 과정에서 국어과를 택했고, 대학 시절에는 우봉(又峰) 한상갑(韓相甲) 선생께 고문진보(古文眞寶)공부를 함으로써 수필과 인연을 맺어 김승우(金承禹)씨가 운영하던 월간 수필문학(隨筆文學)에 글을 싣게 되었다. 따라서 문단에 공식적인 등단(登壇)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1986년 5월부터 12년간을 한국수필문학진흥회(韓國隨筆文學振興會)의 회장으로 계간(季刊)「수필공원(隨筆公苑)」을 발간해 왔다.
수필문학의 삶
이응백 교수의 삶은 곧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삶을 표현한 것이 수필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수필에는 진한 가족애가 담겨있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펴낸 가족문집 <제비>에 피천득 선생은 ‘축하의 글’에서 ‘이 책 속에는 정성, 애처로움, 아낌, 신념, 이런 행복한 가정의 정서가 세련된 필치로 아낌없이 표현되어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교수는 책머리에서 ‘둘이 사이좋게 보금자리를 꾸며 가자는 뜻에서, 그리고 억센 비바람도 서로 의지하며 견디어 나가자고 그 이름을 <제비>라 하였다.’고 했다.
이응백 교수의 수필은 가족 문집에서 선보인 것처럼 가정적인 것들도 많지만 목적이 있는 글 또한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단체의 대표를 맡은 연유로 청탁으로 쓴 글들이 상당수다.
「푸른 불」,「초가을의 멋」,「春心」,「孝」, 「健康 이야기」, 「두루마기」, 「휘파람」,「구름을 쓸면 눈이 오지」, 「월부 도둑」,「君子 大路行」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응백 교수의 수필은 소재로 택한 것 하나 하나에 대한 정확한 표현과 묘사, 그리고 고증을 거친 것들로 오랜 동안 우리에게서 희미해져 있던 것까지 선명하고 확실하게 기억을 새롭게 해준다. 그만큼 그의 수필이 깊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는 것이다.
학자다운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수필을 통해 독자에게 무언가 꼭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담겨져 있다. 수필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독자를 아끼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런 작가의 마음을 독자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이응백 교수의 수필에 대한 사랑은 그 뿐이 아니다. 그는 수필이 우리 문학 전반에 끼치는 비중(比重)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문학을 시·소설·희곡·평론·수필·일기·기록 등으로 나눌 때, 수필은 산문 형식을 취하는 글로 그 정의가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개인의 축적된 경험과 사유에서 빚어지는 내용을 유머와 위트를 곁들여 세련된 문장으로 엮어 나가는 심정적인 글이 수필이다.
수필이 너무 생활 주변의 사생활에 치우치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폐단에 떨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너무 일상적인 상식의 차원에 맴도는 사실을 과감히 도려 버리고, 신선한 자극을 줄 만한 소재나 줄거리여야 할 필요가 있다. 수필이야말로 인생의 다채롭고 깊이가 있는 생각과 판단을 지혜로 꽃피운 인생 여정의 글로서 시 · 소설 · 희곡 등 창작성이 강한 문종(文種)과 확연히 구분이 된다 하겠다. 수필은 그 사람의 인생의 깊이와 고뇌(苦惱)와 향훈(香薰)이 풍겨 나오는 글로, 재치와 반짝이는 순발력(瞬發力)으로는 이룩하지 못할 무게가 있는 글이라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응백 교수의 문학세계
이응백 교수는 국어학 가운데서도 그 응용 부분인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국어교육에 문학이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엄밀이 말하면 문학을 전공한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응백 교수는 중국고전 선문집인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에 들어 있는 여러 글을 접하다 보니, ‘아 이런 글이 훌륭하고, 써 볼 만한 글이로구나!’ 하는 자극을 받아 김승우(金承禹) 교수가 관동출판사(關東出版社)에서 내던 월간(月刊) 『수필문학(隨筆文學)』에 수시로 글을 써서 보냈다. 그때는 이미 대학 강단에 몸담고 있는 때라 써 보내기만 하면 실렸다.
그것이 계기가 돼 1986년 7월부터 12년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으로서 계간(季刊) 『수필공원(隨筆公苑)』발행의 책임을 지고, 현대수필문학상(現代隨筆文學賞)과 수필공원(隨筆公苑)을 통한 등단작가(登壇作家)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문제점에 대해서 <수필과 비평> 1999. 5. 6월호에서 “한국 수필문학은 월간·격월간·계간으로 등록된 단체와 전문지가 9개이고, 기타 동인지(同人誌)는 부지기수로 많다. 그리고 문화센터 등을 통해 실시하는 수필강의도 많아 우리 나라 수필인구는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전문지(專門誌)에서 각각 등단작가(登壇作家)를 내는데, 심사절차에서 엄격한 여부에 차이가 있고, 작품 수준도 차이가 많은 것을 자타(自他)가 공인(公認)하고 있는데, 그러한 차이가 수준이 높은 쪽으로 향상되어 좁혀지기를 바란다.”라고 말해 한국 수필문학의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특히, 이응백 교수는 평소 피천득과 김소운의 수필을 좋아 했으며 또 높게 평가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훌륭한 수필과 작가라면 깔끔한 서정(抒情) 수필 작품으로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의 수필이요, 소재(素材)의 어떠함을 가리지 않고 서정적(抒情的)이건 사회 비평적이건 간에 능란하게 처리해 내는 것은 김소운(金素雲)의 수필이다.” 라고 했다.
죽은 아내를 그리는 문집 사부곡(思婦曲)
1999년 이응백 교수는 결혼 50주년을 맞아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부곡(思婦曲)>을 펴냈다.
1993년 지병인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 민영원(閔瑛媛)여사를 애타게 불러보는 <난향 죽정(蘭香竹情)>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1994년 <영원한 꽃의 향기>, 1995년 <속(續) 영원한 꽃의 향기>, 1996년 아내의 호를 딴 <혜순(慧橓)의 붓자취>에 이어 네 번째로 펴낸 것이었다.
■사부곡(思婦曲)
다시는 죽어도 님의 곁 안 떠나리
이제는 죽어도 님과 함께 있으리
그대 그림자 그대 따르듯
나도 그대 그림자 되어
죽어도 님의 곁 안 떠나리
차라리 그대 그림자 되었던들
이리도 그리운 마음 아니도 애달프련만
이 책에는 이 교수 자신과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의 시, 산문, 기행문, 일기를 포함해 아내를 회고하는 글,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글 등이 담겨 있다.
지난 1949년 아내와 중매로 만나 결혼한 이 교수는 비록 단칸셋방에서 어렵게 시작한 신혼살림이었지만 결혼기념 공동문집을 펴낼 정도로 부부의 정이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적성종고 교가’ ‘파주의 노래’ 작사
해방 전 적성공립소학교를 졸업한 이응백 교수는 1978년 개교한 적성종합고등학교(현 경기세무고등학교)의 교가를 작사 하였다. 당시 학교 개교식에 참석했다가 초대 교장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작사한 적성종고의 교가는 이 교수가 어렸을적 적성에서의 추억을 한껏 담아냈다.
■적성종고 교가
이응백 작사/김성태 작곡
1. 금수강산 삼천리에 정기를 모아
우뚝솟은 감악산은 우리의 기상
그 의지 그득 싣고 도도히 흐르는
임진가람 맑은 물은 우리의 마음
이 기상 이 맘으로 배우고 닦아
영원히 빛내리 우리 적성종고
2. 아침과 저녁으로 굽어 살피는
듬직한 중성터는 우리의 보루
그 뜻을 듬뿍받아 쉬임도 없이
국토의 허리통을 굳건히 지킬
참된 맘 튼튼한 몸 갈고 닦아
나라를 빛내리 우리 적성종고
며칠에 걸쳐 교가를 작사하고 작곡은 우리나라의 여러 명곡을 작곡한 당시 서울대 음악대학장으로 재임하던 김성태 교수에게 부탁해 만들어졌다.
특히 김성태 작곡가는 1960년대 후반 이응백 교수가 가사를 지은 ‘파주의 노래’도 작곡한 일이 있어 남다른 인연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는 ‘파주의 노래’가 이응백 교수가 작사한 사실을 파주시민들은 잘 모른다.
■파주의 노래 / 이응백 작사/김성태 작곡
1. 봉서산(鳳棲山) 옛 성(城)터에 아침해가 비치니
드높이 부푼 가슴 시원스레 트이네
화석정(花石亭) 깊은 숲에 꾀꼬리 소리 맑다
기름진 논밭에 씨뿌리고 거두세
내 고장 파주(坡州)는 한국(韓國)의 허리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조국(祖國)의 역군(役軍)되세
2. 임진강(臨津江) 푸른물이 굽이굽이 흐르니
메말랐던 땅과 맘도 함초롬히 젖었네
월롱산(月籠山) 어린 달빛 이 아니 선경(仙境)이랴
집집의 창문(窓門)마다 밝은 웃음 펴나네
내 고장 파주(坡州)는 한국(韓國)의 중추(中樞)
우리 모두 마음모아 조국(祖國)의 등불되세
이응백 교수는 그의 저서<고향길>에서 ‘파주의 노래’를 작사 할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960대 말 당시 남상집(南相集) 파주군수가 파주 출신 국어관계 학문을 전공한다는 뜻에서 본인에게 ‘파주의 노래’ 작사를 부탁해 와 사양하다가 붓을 들었다. 그러나 주제를 어디다가 두며 무수한 명승(名勝) 고적(古蹟)은 어떻게 반영(反映)시킬 것인가에 이르러서는 쉽사리 붓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유래(由來)로 파주는 파주군 ? 교하군 ? 파평현이 합쳐서 된 것에 광복후 연천군의 일부였던 적성면이 편입된 것이다. 그리하여 위치적으로 중심부에 놓인 봉서산(鳳棲山), 서쪽의 월롱산(月籠山), 북쪽의 화석정(花石亭), 그리고 적성(積城)을 둘러싸서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임진강(臨津江)의 명칭을 따서 각각 파주군을 이룩한 지역들의 대표로 삼았다. 산과 물, 정자(亭子)를 취한것은 조화(調和)를 이루기 위함이다. 이러한 명승이나 고적 자연(自然)이 빚어내는 영상(映像)들을 군민(郡民)들의 의지(意志)와 근면(勤勉), 옥토개발(沃土開發), 명랑한 분위기, 단란(團欒)한 가정건설에 결부시켜 우리나라의 중심부에 있는 우리 고장 파주에서 정신적(精神的)이나 실질적(實質的)인 면에서 우리나라 발전의 빛이 되고 힘이 되자는 것이다.’ 라고 <파주의 노래> 작사에 담긴 의미를 부여했다.
끝없는 고향 파주 사랑
또한, 이응백 교수는 고향 파주에서 나오는 지역신문인 파주신문에 250여회가 넘게 <論語>를 중심으로 1,000자 분량의 <어문수상(語文隨想)>’을 연재하기도 했다.
특히, 고향 파주에 대한 사랑은 여러편에 걸쳐서 기고한 『파주향우회보(坡州鄕友會報)』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1966년 발행된 『파주향우회보 창간호』에 <향우들의 사회적 직업분석-막연한 이향(離鄕)을 아니하도록->이란 글에서는 재경 파주향우들의 직업을 분석하면서 재경향우들에게 ‘우리는 새삼스레 고향에 관한 어느 낭만을 찾을것이 아니라 고향 밖에서 넓혀진 안목(眼目)과 방법을 가지고 고향 발전에 이바지할 길을 모색할 따름이다. 자유업을 하는 이는 자기의 처지에서 또 공직에 있는 이는 공직에 충실함으로써 파주인으로서의 공신력을 높이고 고향의 자제(子弟)를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여 좋은 고향이 이룩되도록 힘을 함께 모을 것이다. 그리하여 막연히 이향(離鄕)을 하는 자제를 내지 않는 견실한 고향으로 만들자.’고 하였다.
1987년 5월 발행된 『파주향우회보』에는 <애향장학(愛鄕?學)의 의의와 필요성>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재경향우회의 애향장학사업 출발에 대한 기쁨과 의의를 피력하였다.
이밖에도 1989년 9월에 발행된 『경기도민회보 제2호』에는 <우리고장 영재교육(英才敎育)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많은 명현들이 배출된 파주의 후생들은 그 분들을 본받아 좋은 싹을 가려 훌륭하게 기를 책무를 느낀다.’고 말해 고향 파주의 인재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이응백 교수는 우리나라 국어교육자로서 국민훈장 동백장(‘82. 12. 14), 대한교련의 교육특별공로상(87. 5. 15)과 국민훈장 모란장(88. 8. 31)을 수상 했으며, 1988년엔 재단법인(財團法人) 동숭학술재단(東崇學術財團)이 제정한 제2회 동숭학술상(東崇學術賞)을, 1998년에는 <수필(隨筆)과 비평사(批評社)>가 제정한 제3회 ‘수필과 비평 대상(大賞)’을 수상했다.
2007년 10월에는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동문회가 창설 60주년을 맞아 첫 ‘자랑스런 국어교육인’으로 이응백 명예교수를 선정했으며 2009년 5월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창회에서 국어학과 국어교육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실천한 공로를 인정해 제1회 청관대상 수상자로 이응백 교수를 선정하기도 했다.
이응백 교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국어학 관련 저서로 <國語敎育史硏究>, <資料를 통해 본 漢字 . 漢字語의 實態와 그 敎育>, <放送과 言語>, <국민학교 學習用基本語彙 硏究> 외 여러권이 있고, 詩文集으로 가족문집「제비」(1979), 부부해외기행문집「旅滴」(1983), 隨筆集「기다림」(1988), 「고향길」(1990)과 時調集「因緣」(1992) 등이 있다. 그리고 ‘아내 追慕文集’으로 매년 1권씩 낸 <永遠한 꽃의 香氣>(1994)가 있다. PAJU IN
난대 이응백 해적이]
1923 파주시 파평면 덕천리(샘내) 330번지 출생
1944 관립경성사범학교 예과(豫科) 5년 수료
1945 관립경성사범학교 본과(本科) 2년 1학기 수료
194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 졸업
1949 서울중고교(6년제) 교사
195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교 교사
1954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조교수
1955 한국국어교육연구회 회장
1957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62 서울대학교 학생과장
1963 대통령 표창
1964 일본 제15회 조선학회 참석
1969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 교무과장
1974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76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장(兼補)
1978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통신교육협회 연차대회
참석
1979 영국 공개대학 칭립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참석
1980 브라질 세계교직단체총연합회 연차대회 참석
1982 하와이 한미수교100주년기념 국제수륙재(水陸齋)
대법회 참가
1982 국민훈장 동백장
1983 서울시 교육회 주최 남태평양지역 교육문화 시찰
1988 한양대학교 대우교수(∼1990)
1988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명예교수
1986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1989 전통문화협의회 회장
1993 한국국어교육연구회 명예회장
1997 한국한자교육활성화추진회 회장
1997 사단법인 한국어문회 이사장
1999 사단법인 중봉조헌선생기념사업회(重峯趙憲先生
紀念事業會) 회장
2003 한국어문회 명예이사장, 한자교육국민운동연합 공
동대표
2010 숙환으로 별세, 향년 87세, 묘소는 남양주시 진건읍
신월리 선영
[주요저서]
1975 『國語敎育史硏究』, 新丘文化社
1988 『續 國語敎育史硏究』, 新丘文化社
1988 『資料를 통해 본 漢字·漢字語의 實態와 그 敎
育』, 亞細亞文化社
2000 『韓中漢文淵源』, 傳統文化硏究會
2001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 現代實學社
[산문집]
1979 가족문집「제비」, 보진재
1983 부부해외기행문집「旅滴」, 보진재
1988 수필집「기다림」, 한샘
1990 에세이「고향길」, 문향사
1999 수필「우리가 사는 길」, 미리내
[시조집]
1982 蘭臺 李應百 時調集「因緣」, 時調生活社
2002 蘭臺 李應百 제2時調集「나들이」, 도서출판 東暻
[참고]
<수필과 비평> 1999. 5. 6월호
문향수필선-1 이응백 에세이 <고향길>, 도서출판 문향,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