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잔치 안재성 지음 / 312쪽 / 도서출판 주목
24년 만에 막 내린 “거짓말 잔치”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진실
1991년, ‘거짓말 잔치’에 초대된 김기설과 강기훈
1991년 5월 8일 어버이날, 서강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사르고 단단한 시멘트 바닥을 향해 몸을 던진 김시설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가 남긴 두 장의 유서가 단초가 되고, 박홍, 김지하 등 정신 나간 ‘사회지도층’들의 ‘분신 배후설’이 불씨가 되어 검찰은 ‘유서 대필’이라는 희대의 사기극을 만들어 낸다. 이 책은 김기설의 분신에 대한 ‘조직적인 배후세력의 개입 여부’에 초점을 맞춘 검찰의 수사와 그 진행과정을 A4용지 1만 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공식기록을 비교, 분석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말하자면, 24년간이나 지속되었던 ‘거짓말 잔치’의 재현인 셈이다.
저자는 건강한 의식구조를 가진 한 청년을 파렴치한 유서대필자로 만든 사건의 이면을 시간의 흐름과 진행에 따라 담담하게 기록했지만, ‘작가적 상상력’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진정성을 얻고 있다. 그것은 읽는 이들의 어떠한 추측이나 예단도 허락하지 않게 때문에, 작가로서는 문장의 ‘건조함’을 감수하고 오로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진실만을 알리고자 한 결단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사건으로 피해를 보게 된 강기훈과 주변인들이 겪었을 심정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중간중간 나오는 놀랐다거나 침통했다거나 하는 심리묘사조차도 진술서에 기록된 그대로 옮긴 데 불과하다. 피해자의 고통을 내세워 동정을 구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작가의 말)’. 진실은 그 어떤 수사나 미문보다도 묵직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법이다.
2015년, ‘잔치’ 막을 내리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분노 속에 감옥에서 보낸 3년과 그 후 지금까지 제가 일관되게 말해왔던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판결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리로 돌려놓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2012년 재심재판정에서 이렇게 외친 강기훈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사건 23년 만인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유서대필에 대해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15개월 후인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항고를 기각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정의의 손을 들어주었다. 24년간 동료의 죽음을 부추기고 자살을 도왔다는 누명을 쓰고 살아온 한 사람의 양심이 돌고 돌아 간신히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강기훈의 ‘청춘’은 끝이 났고 남은 것은 병든 몸과 허탈함 뿐이다.
그나마 끝까지 함께 싸운 변호인들의 “진실 만세!”라는 절절한 외침이 국가권력의 추악한 음모와 폭력에 짓밟힌 강기훈과 그에 분노하던 우리들의 가슴까지 후련하고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더구나 우리 최후의 의지처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사회와 우리 자신의 건전한 상식과 양심이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끼고, 희망의 단서를 찾아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