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어떤 도장을 소유하고 계신가요?
인감도장은 옛날부터 그 사람의 신분과 인격, 권위를 상징하는 일종의 신표였다. 각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인장(印章. 다시 말하면 도장(圖章))이 있게 마련이다.
컴퓨터 버튼 하나로 기계를 움직이고, 채 5분도 안 돼 인장하나가 만들어지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수 조각으로 이름을 새겨 넣고 있는 이가 있다.
문산읍 시내에서 문산역 방향으로 꽃방이 모여 있는 문향로 34-1번지에서 수조각 인장전문점 ‘상인당’을 운영하고 있는 박준상씨(54. 문산읍 당동주공아파트 103동).
그는 파주 고양지역을 통틀어 우리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수조각 인장전문가다. 전국적으로도 장인이나 원로들을 제외하곤 수조각 도장의 마지막 세대라는 것이 박 대표의 설명이다. 싸인이나 지장으로 많이 대체돼 도장 쓸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는 문산 하동(문산2리 사무소 뒤)에서 태어났다. 문산초교와 문산북중, 문산고교를 졸업한 그는 두 돌이 지날 무렵 심한 홍역으로 소아마비를 앓았다.
고2 때 ‘학도호국단 마크’ 공모 당첨 진로 바뀌어
그에게는 13남매를 둔 할머니가 계셨다. 하지만 전사를 하는 등 자식들이 다 요절하고 아들로는 박씨의 아버지 하나만 살았다. 첫 손자인 그가 홍역을 앓고 몸이 불편해지자 수족이 돼 주셨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업고 등하교를 시켰다.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억센 할머니라고 해야 할까요?. 극성맞을 정도로 저를 챙기고 보살펴 주셨어요.”
그런 할머니가 고2때 급작스런 뇌출혈로 돌아가시고 혼자 힘으로 학교를 다녔다. 고교 때 인문계열로 대학진학을 꿈꿨던 그는 2학년 때 학교에서 실시한 ‘학도호국단 마크’ 공모에서 당첨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당시 그의 작품이 학교 호국단 마크로 사용됐다.)
이를 계기로 미술 선생님이 미대로의 진학을 권유, 대학 실기시험을 치렀으나, 예상치 못한 색약 판정으로 불합격 처리돼 미대 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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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휘원’이라는 장애인 직업훈련시설 ‘인장과’ 입학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고교졸업과 함께 당시 경기도 광명 철산리에 있었던 사회복지법인 ‘명휘원(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 여사가 운영)’이라는 장애인 직업훈련시설의 ‘인장과’에 입학한다.
애초 그곳에서 조각을 배울 예정이었다. 하지만 장롱이나 목각 인형 등을 만드는 큰 작업 위주여서 무리가 따랐다. 이곳에서 교재를 보며 실습하고 스스로 기술을 터득한 그는 서울의 ‘정수직업훈련원’에서 열렸던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도장의 장인 유태응(파주 봉일천 출신으로 서울 창신동에서 거인당 운영)을 만나 칼 잡는 법과 고무 도려내는 법 등 기술을 지도받았다.
그는 글씨를 거꾸로 복사 해 연습을 하고 자료나 신문의 도장 광고를 보고 따라 하면서 기술을 습득해 나갔다. “35년간 도장 일을 했지만 아직도 멀었고 흉내 내는 거에 불과합니다. 장인이 되려면 더 연마하고 지금까지 이 일을 이어온 선배들의 장인정신을 밟아가며 노력 해야죠”
문산파출소 앞 동양인쇄소에서 기사로 있다 독립
수조각 도장이 쉽게 파내는 게 아니라 획을 하나하나 긋고 이어갈 때 마다 창작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그는 1982년 도장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구 문산파출소 앞 동양인쇄소에서 기사로 일하다 이듬해 독립했다. 하지만 독립하자마자 도장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컴퓨터의 등장과 누구에게나 영업을 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지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한 것.
그러나 그는 30여 년 동안 잠시도 조각도를 놓아 본 적이 없다. 세월이 바뀌어도 인장전문가로서의 그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오로지 그의 두 손으로 빚어내는 인장 조각품이야말로 어려워도 그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이름 석 자를 파내는데도 긴 공정이 필요하다. 먹을 갈아 붓으로 글씨를 거꾸로 써서 도장을 새긴다. 그래야 작업하는 동안에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게 글자를 앉히고 조각을 하며 정신을 담아낸다.
1~2cm 정도의 좁은 면에 큰 의미와 예술성 함축
인장 하나를 파달라고 맡기면 그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는다. 인장을 쉽게 파내는 기계가 원망스러울 법도 하지만 그의 철학은 뚜렷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생활철학과 자부심이 있습니다. 컴퓨터로 쉽게 갈 수도 있겠지만 자존심이랄까?. 1~2cm 정도의 좁은 면에서 한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지만 그 안에 무궁무진한 큰 의미와 예술성이 함축돼 있어요. 감히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도장은 유명화가가 자를 대고 선을 긋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용납이 안 됩니다.”
그는 1998년 7월 15일, 아무런 장비 없이 지름 1.5cm 크기의 도장 안에 애국가 1절(애국가 1절 52자. 작업년도 숫자 7개, 부호 2개 등 총 61글자)을 새겨 넣을 정도로 일찍부터 세밀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에서 쌀알에 천자문을 새겼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갖고 있는 조각도로 최대한 얼마나 새길 수 있나’를 위해 새겨봤어요. 물론 그들은 특수장비를 사용하죠.”
싸인이나 인장으로 대체, 도장 수요 급감으로 생활고도
그는 앞으로 ‘수 조각 인장업’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생활 소일거리 수준밖에 안 되는 수익구조 때문이다. 돈 번다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세월이 흘렀어도 가격 면에선 변함이 없다.
“도장 하나 수작업으로 하면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96년도 수해 때부터 아직까지 가격변동이 없어요(웃음)”
손님도 일주일에 5명 정도가 전부다. 지역 선배가 건물주로 임대료를 배려해 줘 그나마 다행이다. 때문에 명함과 청첩장, 스티커, 붓글씨, 기념타올 등 간편한 인쇄업도 함께 하고 있다.
‘누가 알아주던 말든 자부심을 갖고 성취감을 가질 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것 같다’는 그는 95년도부터 (사)대한민국인장업협회 파주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문산 당동주공 1단지 103동에 살고 있는 그는 부인 황경란 여사(48)과의 사이에 상현씨(26. 플러스마트 정육코너 근무)와 상진씨(21. 선유산업단지 산업체에서 근무) 등 2남을 두고 있다.